호텔 잠입
(그러고나서 몇날며칠이 지났을까. 암막커튼 탓에 햇빛이 엿보지도, 달빛이 스며들지도 못하는 제 사무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지가. 그는 그의 세상으로부터 도피 중이었다. 그는 그래도 정보부에선 소대장이나 다름 없었으니, 적어도 해당 지부에는 모르는 것이 없어야하는 위치였다. 매달릴 것을 잃어 책임감으로나마 버티던 그가 외면하지 못한 밖에는 그런 소문이 돌았다.
본래 입이 싸기로 유명한 두 인원이 좌천되었다더라. 제 1소대 정보장 사무실에 불 켜져 있던 적이 없는데 응답은 제일 빠르다더라. 요즘 브리핑하는 정보원의 목소리가 차가워진 것 같다더라 – 아니다 이건 원래 그랬다더라, 요즘 행운 센티넬 그 사람…)
…이건 다른 사람이 정리해주세요. 오늘도 별 일 없었나보네요. 다들 한가롭게 이야기할 시간이나 있고.
(녹음 파일을 다른 정보부대원에게 전송하며 그렇게 웅얼거린다. 어떤 목소리가 저를 만류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제 앞의 높게 쌓인 모니터들 탓에 제 사무실에서 보고할 적에도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텐데. 어디서 듣고 왔는지 까치들마냥 자꾸 단 것들을 두고 갔다. 그들이 왜 저를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저를 아껴주고 있음은 알았다. 단지 제게 그들에게 화답할 여력이 없음이라.
‘너도, 말랑한 부분이 있거든’)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통신 오류인가봐요. 13.5초 후 알파 포인트에 타겟 도착한다고 전해주세요. 이제 12.4초. 다른 분들은 퇴로 확인해주시고요. 폐쇄회로tv 권한 드릴 테니까.
(모르겠다. 이럴 때면 당신이 좀 더 저를 응원해주거나 그들에게 해명해줬을까. 분명 당신을 같은 소대로 데려오려고 했으니까. 보답하지 못할 친절이 어려웠다. 업무가 전부 끝나고나면, 길을 잃은 애처럼 굴 여유가 생길 새라, 다른 업무를 끌고왔다. 팀원들 없이 할 수 있는 것들. 잔업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분류 작업들. 하다못해 정말 쓰잘데기 없는 파일 정리들. 원래 이 시간이면 늘 당신을 확인했는데. 사랑받고 싶다며 예뻐해달라며 응석을 부릴 순 없으니, 당신이 무얼 했는지 어떤 임무를 했는지, 위험하지는 않았는지, 즐거웠는지… 그런 걸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면, 당신이 제게로 돌아와줬는데.
‘설아, 괜찮은거지? 안 아팠어?’
너무 아파요.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눈알이 쪼개질 것 같아서. 숨 쉴때마다 형이 없는 걸 알아서, 차라리, 나쁜 생각을 하게 돼요. 형도 알잖아요, 제가 고통은 잘 참는 거, 그래도.. 그래도 너무 아파요. 제멋대로 쪼개지고 편집된 영상마냥 당신의 음성이 떠다녔다. 이 말은 언제 했던거지. 저 말은? 계속 반복재생 해놓은 테이프가 늘어지고 꼬이듯 엉망이 되어버린 기억들을 붙들며 살아갔다.
‘앞에서 반짝이는 화면만 보고 있던 그 모습이..나도 그냥 거기서 걸어나왔던 것 같아.’ …내 얘기인가. 그래서 그렇게 걸어나갔어? 아냐 그 날 그렇게 울던 당신을 두고 나온 건 나였잖아. ‘오싹하네. 아직도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어차피 틀지도 못할 영상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잖아. 더 이상 갱신되지도 않는 날짜들을 붙잡고 먼지를 후우 불어가며 간직할 순 있는거잖아.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이 정도 욕심은 괜찮잖아. ‘내 생각은 하지마.’ …와중에 듣고 싶은 말은 죽어도 들려주지 않는게 환청마저도 당신을 닮았어. 당신도 제게 제법 많은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부분만 담뱃불로 지져버린 것 마냥, 들려주질 않았다. 그게 못내 서러워서, 귀를 기울이기 싫었다.
‘같이 잘까 우리.’)
…머리 아파..
(귀를 찌르는 고함소리, 눈을 찌르는 햇빛, 우당탕탕 거리는 진동.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후드집업을 다시 뒤집어쓰며 어영부영 일어나자 본부장이 정신차리라며 꽥 소릴치는 소리와, 정보장님 며칠만에 처음 잠든 거란 말이에요, 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근데 설이 너는 여기 얼마나 오래 있을 생각이야?’
“언제까지 죽상일건데? 본부장이 애 잡겠다는 얘기가 있다고.”)
그런 소문이 없는 건 알아요. 제 담당이잖아요.
(“니가 어거지로 하고 있는거지 애초에 2소대 담당이다. 애들이 울더라. 할 일 없다고.”
…그럼 어제 일 전달해준 건 다른 소대원이었던가. 안경을 겨우 찾아 끼우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낯 인식한다. 본부장은 ,,,그대로고 나머지는 목소리만 익숙했다. 그보다 저한테 냄새날건데, 잘도 제게 붙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보다도.
‘이게 뭐야?’)
그래. 그거요. 무슨 일이세요?
(미칠 때까지 일을 시킨적은 없는데, 하고 꿍시렁대며 본부장이 툭 봉투를 하나 던진다. 장 달고선 현장 임무를 맡은 적이 드문데, 이전에 배정되었던데다가 타겟이 예민하여 보통 실력으로는 어렵다나. 그나마 그가 오입질에 미친 난봉꾼이라 뚫은 구석이 바에 호스트로 잠입하는 것 뿐이란다. 오늘 원래 직원 대신 대타 자리로 넣어놨으니 마담과 이야기 자알 해보라며 우다다 브리핑을 쏟아내시더니 사무실에서 저를 쫓아냈다.)
본부장님. 양치도구 안에 있는..
(문을 열려고 해도 안에서 무언가 걸렸는지 소리만 나고 열리질 않는다.
“내 사무실에 인원 대기시켜놨다. 들어가는 법은…야. 저 암막커튼도 다 치워버려. 저런 건 준 적 없는데 어디서 구해온 거야? 넌 얼른 가. 안가? 명령해?”
…본부장의 명령도 무시한적이 많아서 별로 좋은 협박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도에 오래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라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너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 잠만 자고 나오는 시간이 모여 며칠이 되고, 몇 주가 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빈 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벽 사이에 갇히면 조용한 공기는 어린 저를 먹어치우는 듯 싶었고, 끝없이 솟아나는 외로움과 불안 속에서 저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현관을 나서기 전에 멈춰 서, 어두컴컴한 네 방 안을 돌아본다. 모니터에 두텁게 먼지가 쌓여간다. 언젠간 저걸 네게 다시 돌려줘야 하는데. 너는 정말로 내가 그렇게 싫었을까. 정말로, 이 모든걸 버리고 갈만큼. 쇼파엔 아직도 너가 낮잠을 잘 때 자주 덮고 자던 담요가 있었고, 제 베개에선 종종 곱슬기가 없는 검은 머리가 나왔다. 냉장고엔 너가 사둔 간식들이 달달함을 잃어갔고, 이 모든건 제가 하나 둘 씩 정리해가면 사라지는 흔적이 된다.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나 덧 없고 허무한 사랑이, 아직도 제 마음속엔 선명한 흉터처럼 남아있다는게.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는 기대를 아직도 할만큼 너를 사랑하면서. 그깟 말 한마디를 못 해 너를 놓쳤다. 제 행운이 어떻게든 너를 붙잡아놓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너가 제 주사위의 자리를 꿰차고 제 행운의 지표를 대신했던 것처럼, 너가 떠난 시점부터 많은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참여하는 전투마다 부상자가 늘었고 계산했던 것들은 결과값을 벗어났다. 너가 나의 일부가 되어 떨어져나가면서 제 행운을 가지고 가기라도 한걸까. 이능력자로서 쓸모를 다 하지 못해도 혹독히 훈련 받은 것은 지워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임무에 배치받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 사활을 다했고, 오늘도 그 중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잠들지 못했던 여러 밤처럼 어두운 천장 아래 두 눈이 음울하게 침전한다. 그 바닥을 짚기 전에 저를 건져 올린 것은 주머니 안의 진동이었다. 동기와 친구, 상관에게서 온 무수히 많은 메세지 알림들 가장 상단에 뜬 이름을 확인한다. 뻔히 알면서 혼자 실망하는 행동은 언제쯤 그만 하게 될까.
[펠, 어디야?]
[미팅 시간까지 20분도 안 남았는데.]
[이제 출발해. 10분 안에 갈게.]
[너가 신의 사랑을 받는 애라는걸 깜박했네.]
[대체 어떻게 매번 그렇게 오는거야? 정말 네 사진을 프린트해서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라도 해야겠어.]
[아참, 너 이번엔 나 말고 1소대 요원이랑 같이 출동하더라. 아쉬워ㅠ 모처럼 재미있는 곳에 파견인데.]
[난 옆방에서 구경할게 > <]
1소대? 얼굴이 섞이는구나. 너무 매번 같은 조합으로만 나서면 상대가 알아보니 그럴테다. 그러고보니 너가 거기에 있었는데. 이번에도 너는 정보원으로서 역할을 다 하겠지. 근래 우리 부서 일까지 가져갈 정도라고 했으니. 혹시 이번 임무에도 참여하게 될까? 섣부른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미 문을 응시하는 두 눈에선 빛이 튀고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본부 사무실에 도착하여 사무실 자리에 앉는다.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반쯤 뉘인 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파일을 집어든다. 이번 작전의 내용과 주요 인물의 사진을 확인한다. 잠입 팀은 총 세 쌍. 그 중 하나가 나, 그리고... 너?
덜컹, 사무실 문이 열리자 그에 맞춰 벌떡 일어난다.)
(모자라도 겨우 받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후드까지 뒤집어 쓰니 영락없는 폐인이다. 흐릿한 창에 비치는 제 인영도 무시한 채 휘적휘적 본부장 사무실 문을 연다. 파일이야.. 가는 길에 읽으면 되겠지, 버리지 못한 오만을 가지고. 그게 이런 일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으니.)
…환시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계산이 틀렸나...
(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당신의 모습에 영 알 수 없는 말을 작게 흘린다. 당신을 보고서도 늘 믿을 수가 없었는데, 당신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했으니 이젠 증명할 방도도 없어서, 있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제가 미친 놈이 되는 것이 깔끔하지 않는가. 느릿하게 봉투를 열어 파일을 훑는다. 그제야 상황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아직은 당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데. 이마저도 당신의 깜찍한 행운의 농간일련지. 그걸 깊게 생각하기엔 아주 지쳤다.)
..제가, 준비를 조금 해야해서, 늦을 것 같은데…
(나직한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당신에게 닿는다. 제대로 목소리를 냈는지 조차 모르겠다. 하긴 그 날 이후로 그 어떤 것도 모르겠는데. 그제야 당신에게 시선이 흐르면 어째서인지 생각보다 몸이 상한 듯한 당신이 보인다. 그 모습이 영원히 정답을 알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와도 같아 목을 조른다. 생각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리게 흘러간다. 원래대로라면, 기다려달라고 했겠지만은.)
…먼저 가셔도 돼요.
(순간 무서워서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네가 저를 눈에 담자마자 뒤돌아서 나가버릴까봐. 저를 떠났던 그 날처럼. 서늘한 사무실 아래 선언 같은 목소리가 떨어진다. 그건 작고 갈라져있었지만 분명히 들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공간을 나가지 않는 너를 보고 바보같이 희망을 얻지. 네게 꽂힌 눈이 흔들렸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잘 지냈어? 밥은 잘 먹고 다녔고? 다친 곳은 없어? 그러나 그 모든 질문과 관심은 너를 밖으로 등 떠밀게 할 여지로 느껴져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자리에 다시 앉는다. 고개를 설설 젓고 너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천천히 씻고 나와. 어차피 상의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당신의 말이 지나간 이후에도 우뚝 서있다가 한 박자 느리게 고갯짓하고 움직이는 것이 상태가 나빠보인다. 본부장도 분장을 많이 하는 터라 사무실에 딸린 메이크업실이나 욕실을 훑어보다가, 뒤늦게 생각난듯 우리 둘 사이의 유리 문을 닫는다. 고작해야 불투명한 유리문이 뭐라고. 단절된 것 같은 기분도, 안도감도 동시에 드는 기묘함을 불러일으키는지. 흐릿하게 보이는 당신의 색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사부작 소릴 내며 탈의한다. 후드집업의 지퍼를 내리고, 반팔 목 부분을 위로 당겨 벗는다. 엄지손가락에 브리프와 반바지를 모두 걸어 허리를 숙여 마저 벗고나면 전라가 된다. 이내 달칵이는 소리가 두어번 나더니, 물소리가 새어나갔다. 따듯한 물에 닿으니 저도 모르게 눅눅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입술을 꾹 닫는다. 부끄러움인지 더위 탓인지 모르게 거울 속 귓가가 붉어져 저도 모르게 만지작 거리곤 서둘러 씻기로 한다. 포장된 일회용 면도기를 보고서야, 제가 잠입하는 장소를 다시 떠올린다. 속으로 본부장의 욕을 하며, 밖을 힐끔힐끔 보게 됐다. 샤워시간이 생각보다 더 걸릴 것 같다.)
(점점 살색을 띠는 유리문 너머의 인영으로부터 부던히도 고개를 돌린 채, 눈을 방 구석구석으로 도록 굴린다. 방 안이 고요한 탓인지 화장실에서의 작은 소음 하나하나가 크게 울린다. 그럴 때마다 초조하게 손에 낀 반지를 돌리고 긁었다. 물소리가 들리고 얼핏 네 목소리가 들렸을 적엔 몸을 작게 움찔였다가, 결국 무거운 한숨을 코로 내쉰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한 손으로 눈가를 쓸며 마른 세수를 했다. 눈을 감아도 네가 어떤 모습으로 물을 맞고 있을지 선연하게 그려져 그마저도 그만두게 됐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얄팍한 감성에 젖어 실수를 해선 안되는데. 그 생각에 심호흡 한번과 고개를 들어 가면을 쓴다. 한 때 네 앞에선 절대로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낡은 것을. 덤덤한 표정으로 탁상 위에 놓인 턱시도를 집어들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류상 이쪽 호스트 바는 잘 차려입은 도련님들도 많이 찾아온다지. 저는 오늘 그 중 한 명이 될 예정이었다. 떠오르는 기업의 차기 회장이자 철없는 대표의 아들. 맨 몸 위로 흰 셔츠를 둘러 입고 밸트와 가터를 채운다. 어린 난봉꾼 치고는 입맛이 고상한가.)
(그의 준비는 당신보다 조금 더 걸렸다. 아무래도 제모의 문제도 있지만 몸의 흉터와 문신을 전부 지워야했으니까. 역할이 역할인 탓에 더 꼼꼼하게 지워야한다며 거듭 강조했으니 익숙한 손짓으로 자연스럽게 지워나가면서도 거울에 세워둔 파일에 시선이 간다. ‘백발 추천’ 이라. 그러면 컬러렌즈는 끼지 않아도 되겠네. 하기사 매번 검은 머리로 임무를 나간 것도 아니었으니 별로 거슬릴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안전성은 오르니까. 스프레이로 머리를 하얗게 칠하면서도 왜 이렇게 이 문구가 눈에 걸리는지 알 수 없을 다름이다.
그의 시나리오는, 급전이 필요해 오늘 친구의 대타를 뛰러온 대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신경 쓴 듯하지만 싸구려인 것을 숨길 수 없는 와이셔츠와 슬랙스가 준비되어있다고 하지만 왜인지 이 곳에는 슬랙스밖에 없어서. 셔츠만 입으면 되는데 고갤 돌려보다가 당신의 인영이 시야에 비추자, 혹시나 싶었다. …아직 당신을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는데. 형이라는 호칭이 뭐 대수인가 싶겠지만 이제 그에겐 어려워졌기 때문에. 결국 제가 직접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문을 열고 나와, 한 눈에 봐도 질이 떨어져보이는 셔츠를 집어든다. 단추를 끼우며, 왜인지 낯설지만은 않은 당신의 표정을 힐끔 보았다가, 말을 잇는다.)
…상의할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반라의 네가 눈에 들어오자 묵직한 롤렉스를 채우던 손이 멈춘다. 숨길 수도 없이 시선이 하늘거리는 백발로 꽂혀있다가, 질문이 떨어지고서야 꿈에서 깨어나 다시 손목 단추의 매무새나 가다듬었다.)
...백발도 잘 어울리네. 예쁘다.
(건조한 어조였으나 입가에 옅게 서린 미소는 어쩔 수 없었을터. 저도 어느정도 더 손 볼 구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너를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간다. 거울 앞에 서서 찬장을 열어 헤어젤 하나를 꺼내어 열고.)
서류 내용은, 확인했지?
(예쁘다는 말 뒤에 마땅히 와야할 입맞춤이 없어서 서운했다. 이젠 그럴 자격도 없는데. 속절없이 떨리고 마는 심장이 야속하기만 하지. 당신의 말에 괜히 어색하게 제 머리를 쓸어보면 나풀 거리는 머리칼이 한결 정리 되었다. 셔츠를 바지에 적당히 구겨넣으며 고갤 끄덕인다.)
호텔 지하에 있는 바라면서요. 소개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저는 기회를 봐서 타겟에게 도청장치를 심으면 되었다. 아무래도 호스트 역이니 이래저래 몸 붙일 일이 많다고 생각한 걸까. 어차피 거기에서 화장을 손보고 제공되는 유니폼을 입어야할테니 더 손댈 것은 없었다. 단 한가지 빼고. 본부장 책상 서랍에서 벨벳 케이스를 하나 꺼내 양 중지에 반지를 끼운다. 사실을 말하는데도 변명이라도 하듯 덧붙이게 된다.)
...혈중 알코올 농도를 조절하는 장치랑 도청 장치에요. 전에 회식하신다고 빌려가셔서요.
(화장실 거울로 네 손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하고 픽 웃음을 흘린다. 네가 변명하지 않아도 본부장님과 너가 사적인 일로 엮일 거란 상상은 들지 않았으니.)
하긴, 술에 너무 꼴아서 미션을 놓치면 안되지. 호스트라면 주는대로 받아먹어야 할 거야. 속 아프면 안되니까 저기 놓인 약도 전부 먹어놔.
(옆머리를 쓸던 손으로 탁자 위에 구비된 숙취해소제를 가리킨 뒤 손에 묻은 젤을 씻어냈다. 준비를 마치고 돌아서면 곱슬기를 빗어눌러 만든 포마드 올백에서 앞머리 몇올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잘 할 수 있겠어? 현장 일도 오랜만인데다가. 상대를 유혹해야 할텐데. 너가 그런걸 잘 할 것 같진,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꾹 다문다. 전에 너가, 이런 일에 대한 적임자는 따로 있을거라 했던 그 말이 떠올라서.)
(당신의 말이 왜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는지. 서운함에 푹푹 마음을 썩혀가면서도 숙인 낯에 비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약을 삼킬 때 그 맛에 대한 뚜렷한 혐오감만을 겨우 비춘다. 당신의 말은 어쩐지, 술이든 제 미숙탓이든 당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려서, 울컥거리는 심정을 함께 삼켜야했다.)
잠입도 해봤어요. 제가 형 앞에서나.
(순진했지.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다가, 말을 끝내지 못한다. 당신 앞에서나 늘 서툴렀을 뿐, 남을 속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서 뭐할까. 어린 애의 볼멘소리밖에 더 되나. 대답하느라 당신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방문으로 향한다. 사실 우린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싼티나는 셔츠와 롤렉스를 같이 착용해봤자 우스운 것처럼. 약 탓을 해보지만, 감안해도 입이 썼다.)
…가죠. 면접 시간 늦겠어요.
(말을 하다 마는 네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이제와서 말을 줏을 수가 없었다. 키스부터 여타 스킨쉽까지 모두 저가 처음부터 가르쳐줬었는데, 심지어 저 아닌 다른 이를 상대해본 적도 없었을거고. 그런 네가 매니악한 취향의 중년 남성의 터치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걱정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서로의 감정 부유물이 이 공간에 너무 많다. 너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기분이 찝찝해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너는 못 들었겠지만, 제 미션에는 너를 다치지 않게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넌 아직 어린 미성년자였고, 아무리 사설 단체의 미션이라 한들 마약에 중독되거나 윤간에 가까운 불상사는 막는 것이 도리였으니까. 밤사이 어린 호스트 한명 쯤이야 사라져도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곳이 이곳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상류사회의 굴 안으로 들어간다.)
부여받은 내 차는 오픈형 스포츠카라서 함께 내리기엔 너무 눈에 띌거야. 가서 만나자. 들어오면 인이어로 연락해.
(입매를 당겨 빙긋 웃어보인다.)
행운을 빌어.
(알겠다며 고갤 끄덕이곤 먼저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그러다가 이어지는 당신의 웃음과 문장에 반쯤 나간 몸이 잠시간 멈췄다. 이 정도는 말해도 되는 걸까. )
형도요.
(스스로가 무얼 두려워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아서, 도망치 듯 문을 닫고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여기까지라고 그어둔 선을 살금살금 뒤로 물리다보면, 당신은 또다시 제 마음을 맛볼텐데. 한 입 먹히곤 떨어지는 선악과 마냥 그 쓰임을 다 했다며 버려질텐데.
그 날 이후 오토바이에 쌓인 먼지를 대강 손수건으로 훔친다. 하기사 너무 깔끔한 것도 이상하겠지. 제법 먼 거리임에도 금새 도착하는 것이, 우울한 와중에도 흡족했다.
“자기가 오늘 대타야?”
끈나시가 아슬한 이브닝 드레스입은 마담이 저를 반겼다. 제 볼을 한 번 만져보더니, 하얗고 말랑한 것이 마음에 든다며 깔깔 웃던 마담이 출근하지 말고 누나랑 침대로 가자며 제 허리를 살살 쓸어본다.)
…그러니까, 오늘 바니 데이라고요.
(원래 신입은 자기가 직접 소개하는 법이라며 이런저런 화장도구를 들고온 마담이 고갤 끄덕인다. 저번주에 바니걸데이가 있었는데, 자기네들도 하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꺼내는 것들은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알 수 없는 망사 스타킹과, 커프스와 세트인 빨간 리본. 하얀 토끼 귀. 마지막으로 가죽 소재의 하이레그 모노키니까지. 와중에 허리를 고정해주는 끈을 잡아당겨 리본을 묶어주는 마담이 가슴 부분은 팁 많이 받아 오라며 부러 헐렁하게 묶은 탓에 잘못 숙였다가는 전부 보여지게 생겼다. 메이크업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는 건 기분탓인걸까.)
(그저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었으나, 너의 그 말 한마디라 제겐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양 묘하게 들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 나의 행운은 지금까지도 너가 꽉 쥐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왠지 감이 좋네. 스포츠 카를 몰고 시원한 바람을 쐬며, 길목마다 저를 기다렸다는 양 켜지는 파란 불을 지나친다. 발렛을 맡기고 북적이는 호텔 내부의 외곽으로 빠진다. 뚜벅뚜벅, 제 발 소리가 울려퍼지는 은근한 조명의 끝에 다다라서는, 문지기에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출입증을 내민다. 제 키의 두배는 되는 사내가 그것을 유심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제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환영합니다, Mr. Lee."
그가 한 발자국 물러서면 지하로 통하는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그 검은 상자 안으로 들어서서 층수가 B6로 내려가기 전에 넥타이를 좀 느슨하게 당기고 셔츠 깃을 풀어헤친다. 너무 단정한게 영 마음에 걸려서였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쿵쿵 울리던 클럽 베이스는 은밀한 공간이 드러나자 고막을 찢기 시작한다. 말초신경을 때리는 날카로운 음악과 조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비로소 게임이 시작된다. 곳곳에 놓인 쇼파와 테이블엔 이미 여럿이 남녀 구분 없이 뒤엉켜 웃음과 술을 나누고 있었고, 중앙의 단상 위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관능적으로 폴댄스를 추고 있었다. 주위를 적당히 둘러보며 타겟을 찾던 도중, 파일 안에서 본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김정훈. 오늘의 타겟. 네이비색 수트를 입고 희끗한 머리를 옆으로 넘긴 그는 이미 한 손에 여자 하나를 안고 한창 재미를 보고 있었다. 두툼한 손이 쫙 붙은 스커트의 안으로 멋대로 파고드는 걸 지켜보다가 옆에 선 직원에게 금빛 카드 한장을 내밀며 맞은편 테이블에 술을 놓아달라고 요청한다. 푹신한 쇼파에 앉으니 교묘하게 가려지지 않은 파티션 너머로 타겟이 시야에 들어왔다. 위스키 한 잔을 손에 쥐고, 입술을 가린다.)
정 중앙 왼쪽 테이블에 앉았어. 지금 어디야.
곧 나갈 것 같아요.
(당신의 인이어로 음성을 보내며, 도구를 정리 중인 마담을 본다. 돌겠네. 못 나간다고 징징거려봤자, 당신에겐 방해일 뿐이겠지. 토끼혀립이니 도화살이니, 영 알 수 없는 시간이 드디어 끝은 났는데. 거울을 보면 보송한 토끼귀를 한 흰머리의 제가 보였다. 차라리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색기만 부각하는 메이크업이 대단하긴 했지만, 고마운 것은 마담의 이능 뿐이었다. 아무리 물고빨아도 메이크업이 벗겨지지 않을테니 걱정말라며 마담이 제 허리를 감은 채 바를 들어가면, 자연스레 시선이 모인다. 힐끔 곁눈질로 당신의 위치를 확인해도 이미 퇴로는 없었다. 그동안 마치 어여쁜 인형인 양, 마담이 제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자랑한다.
“바니데이 기념, 우리 바 신입 토끼.., 쿠키에요. 우리 신사숙녀분들 잘 아시죠? 흰 우유랑 제일 잘 어울리는 간식은 쿠키인 거.”)
누나. 손님이 보시잖아요.
(귀를 붉히면서 제 엉덩이를 쥐고 있던 마담의 손을 떼어내곤 저를 부르는 테이블로 이동한다. 당신에겐 미지근할 미소가 다른 이들에겐 제법 수줍은 표정 같다. 짧은 하이힐, 그 위로 뽀얀 다리가 길게 이어진다. 망사가 말랑한 허벅지를 충분히 감싸기 힘겨웠는지, 그가 사람들 사이를 움직일 때마다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가죽 하이레그는 정석적인 바니걸 복장인 줄 알았으나, 그의 뒤를 본 사람에게만 알려주겠다며 허리까지 훅 파인 것이 얇디 얇은 끈에 겨우 의존하고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이 곳, 누군가의 손가락이라도 잘못 걸렸다가 아주 즐거운 사고를 기대한다는 듯.)
(준비가 오래 걸리나보지. 그러고보니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고 했던가. 살색을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바니보이들이 사이사이 끼여있었다. 설마 너도 이렇게... 하이레그에 눌린 바니보이의 통통한 엉덩이가 제 눈앞을 지나간다. 생각을 비우려 잔을 기울이던 손은, 마담의 목소리에 맞춰 무뚝 멈춘다. 하얀 머리, 그건 너무나도 눈에 띄어 너인걸 단박에 알아챘다. 하지만 그 복장은. 잔을 입에서 떼고 네가 뚜벅뚜벅 걸어내려오는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귀 끝이 빨개져봤자 조명이 가려줄 것이고, 제 손에 들린 것은 편리하게도 술잔이 아닌가. 분명 너도 저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은데. 하필 앳되면 앳되어보일 수록 더 아랫도리와 손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우리의 타겟은 제 맞은편에 앉아 네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탓에 너가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겠으나, 한 걸음씩 탄탄한 허벅지 살을 흔들며 다가오는 너의 모습에 마른 침을 삼키며 바보같은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쾅쾅 울리는 속이 제 심장의 뜀박질인지 아니면 음악소리에 맞춰 울리는 공명인지 알 수 없다.)
(타겟이 제게 손짓하는 것을 앎에도 부러 다른 사람 테이블을 먼저 돈다. 원래, 먹고 싶을 때 먹기보단 배고플 때 먹는 것이, 가장 맛있는 법이니까. 어떤 손님 앞에선 차가운 테이블 위에 앉아 러브샷을 보여줬고, 어떤 손님 앞에선 허릴 숙여 농담을 속삭였다. 어떤 손님은 부러 일어나 절 환영한답시고 주둥이가 긴 술병을 제 고갤 젖혀 붓기도 했다. 당신의 시선을 모르는 하얀 토끼는 제 꼬릴 살랑이며 이 모든 걸 감내했다. 다른 이들더러 잔뜩 봐두라는 듯 스스로를 미끼 삼으며.)
아, 손님 죄송해요.
(그렇게 한 테이블, 두 테이블 지나다보면, 설의 가슴에는 룸넘버가 적힌 지폐들이 잔뜩 끼워져있었다. 누군가는 힙라인에도 끼워보려 했지만, 살로 가득 차 다른 이와 같이 가슴에 밀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슬슬 타겟에게 접근할 적에 밀쳐진 것처럼 타겟의 품에 안긴다. ...당신과 임무를 온 덕인걸까. 실제로, 운이 좋게 누군가 저를 밀쳤으므로, 연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타겟의 옷깃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도청장치를 달 찰나에, 그동안 아주 목이 탔던 타겟은 우왁스럽게 엉덩이를 쥐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실컷 놀았으면, 이제 아저씨랑 단둘이 보는 건 어때?”
둥글게 만 지폐 덩어리를 있지도 않은 가슴 사이에 쑤셔넣고, 허벅지를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것이, 타겟의 음흉한 속내가 뻔했다. 조심스럽게 팔에 힘을 주어 밀어내는데도, 오히려 몸을 붙혀오는 것이 역겨웠다.)
(역시 검은 이들은 새햐앟고 어린 토끼를 가만히 둘 수 없었나보다. 테이블마다 너를 만지고 훑고 보내주는걸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린다. 낯선 이가 네 엉덩이를 한번 쥐고, 볼을 잡아 채고, 허리를 감아 안을 때마다 제 잔은 한번, 두번, 비워지고 채워진다. 평소의 페이스보다 꽤 빨리 마시고 있었으나 이러면 적어도 달아오른 제 얼굴은 가릴 수 있겠지. 깊게 콧 숨을 내쉬자 평소 잘 나지 않던 술내가 날법 했다. 언제 저렇게 노련해진거지. 아니, 저가 모르는 너의 모습이었을까. 분명 제 손길을 받을 때는 수줍은 미소만 짓던 검은 머리의 너와 기억이 겹쳐지지 않았다. 메이크업 때문인지, 아예 다른 이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는게 그나마 마음에 안정을 주었을까. 드디어 타겟과 제 테이블 사이로 너가 걸어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세를 살짝 고쳐앉고 눈에 불꽃을 하나 둘씩 띄우기 시작했으나, 그 앞을 다른 바니보이 한 명이 가로막아선다.
"형, 혼자서 왜 그러고 있어요. 내가 즐겁게 해줄까요?"
검은 귀를 단 붉은 머리의 여우과 남자가 제 앞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손등으로 볼을 살살 쓴다. 네가 보이지 않아. 시야 앞에서 그를 치우기 위해 그 허연 손목을 잡고 제 옆자리로 당겨 앉힌다. 그러고 보면 다들 곁에 누군갈 끼고 놀고 있었는데, 저만 혼자 궁상 맞게 술만 먹고 있는다면 수상해보일테니. 꺄르륵 웃으며 제 다리 위를 문지르는 그의 허리를 한 손에 감고 싱긋 웃어보인다. 한 손으론 술 잔을 마저 기울이며, 시선은 다시 너와 타켓에게로 간간히 둔다. 어떡하지. 네가 명백하게 곤란한 눈빛을 띠고 있었는데. 표정 관리를 해야 해. 밀어내지 말고, 아예 올라타거나 붙어서 심고 떨어지는게 빨라. 그리 말하고 싶었으나 옆에서 조잘거리는 여우상의 사내 덕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네 살결 곳곳을 주물러대는 거친 손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것도 한 몫 했다.)
(바의 싸구려 인이어와 본부의 인이어가 동기화된 탓에, 당신이 저를 도우러 올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론 정말 객실로 데려갈 기색이라, 상대에게서 고갤 조금 빼본다.
…한 편으론 그런 생각도 했다. 아예 싫어하는 사람이랑 침대에서 뒹굴어본다면, 확연한 비교대상이 있으니까, 제 사랑을 증명해보일 수 있을까. 이 역겨운 이와의 하룻밤이 당신과의 섹스에서 제가 환희를 느낀 이유는 섹스가 아니라 당신이었음을 당신에게 보여줄 방법이 될까. 그게 설령 옳은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리를 벌리고 싶진 않았다.)
나도, 아저씨랑 너무 놀고 싶은데, 선약이 있어서요.
(애써 가장해왔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듯 아슬했다. 힘으로 제 허리를 끌어와 위에 앉힌 타겟이 귀여운 투정을 다 본다는 듯 웃는다. 자기는 비싼 화대를 냈다 이거겠지. 저는 이미 더 값진 걸 받은 적이 있다는 걸 모르고. 가죽 옷이 들러붙어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 부근을 손으로 희롱하다가, 저를 태운 다리를 벌려 허벅다리를 억지로 벌린다. 그 안 쪽의 특이점을 발견하고는 콧노래까지 부른다.
“아저씨가 금방 기분 좋게 해줄게.”
스타킹 아래 야들함을 맛보려는 듯 선 아래로 두꺼운 손가락을 밀어넣으려 했다. 최악이네. 속으로 퇴로를 짜보며 두 손으로 그 손을 붙잡는다.)
손님, 해당 바에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시잖아요.
("혀엉. 어딜 봐. 응? 나 여기 있잖아."
애교가 가득한 볼멘소리를 내며 제 턱선을 살살 쓸어간다. 레오라고 했던가. 아까 혼자서 떠들던 내용에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제 시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번갈아보던 그는 너를 발견하고 하? 웃어보이더니 제 어깨 위로 손을 둘러 다리 위에 앉아버린다. 또 다시 시야에서 네가 가려진다.)
"저 햐안 토끼가 좋은거야? 이거 자존심 상하네. 쟤는 신참이라 아는거 없어."
나 아무나한테나 안 이러는데, 형이 너무 내 취향이라서. 그런 말을 하며 제 두 손을 끌어와 허리에 올려버리는 것이다. 시킨 술이며 시계며, 딱 봐도 돈이 많은게 티가 났나보지. 또 마음대로 요리해먹기에 지금 저는 적당히 취해보이기도 했으니까. 눈꼬리를 얇게 찢어 웃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이곤, 그대로 허리를 감아 안아올리더니 테이블 위로 눕혀버린다. 땡그랑, 술병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레오의 기대에 찬 탄성이 났으나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젠 다시 너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문제는 그가 너를 본격적으로 맛보기 시작하려 했다는 거다. 찢어질듯 들춰진 망사 아래로 너의 흰 다리살이 손길을 따라 붉게 달아오른다. 머리가 순간 뜨거워진다. 너가 어디까지 만져지고 희롱당해야 제가 손을 쓸 것인지, 임무를 나서기에 앞서 스스로도 기준을 정해두었으나, 이제 와서 그런건 다 의미 없다며 이성이 흔들린다. 우선 너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두 눈이 타오른다. 옆 테이블에서 떨어진 냅킨 조각을 밟고 술병을 들고 나르던 웨이터가 휘청인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으나 그 몸짓에 떠밀린 한 둘씩 도미노처럼 흔들려 결국엔 누군가의 얼음 버켓이 타겟에게로 엎질러지고 만다. 그 정도면 네게 숨통을 트이게 해줬겠다. 예상대로 욕짓거리를 외치며 타겟이 너를 잠시 무릎에서 내린다. 잠시 소란이 이는 사이, 레오가 더는 저를 귀찮게 하지 않도록 다리 한 쪽을 들어 적당히 어루고 놀아주고 있었다.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는 그가 제 목 둘레를 끌어와 룸으로 가자고 유혹하고 있었으나 온 신경은 여전히 네게 가 있었다. 그 사이 타겟은 네게 선물할 술을 한 잔 따르고 있었다. 잔 바닥에서는 하얀 기포가 뽀글뽀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걸 들어 네게 내민다.
"어른이 주는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먹어야지. 응? 예쁘게 먹으면 팁을 두배로 주마.")
읏..
(그가 몸을 움찔 떨었다. 다른 이의 손짓 탓이 아니라 그 차가움 탓에. 덕분에 손아귀에선 벗어났지만, 차가운 물방울이 조명을 받으며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정도로 아둔한 것은 아니라 건너편 테이블을 슬쩍 보면.)
...
(마음이 불편했다. 당신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늘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어 저를 혼란스럽게 했는데, 지금은 너무 잘 알았기에. 질투였다. 이젠 가져서도 안되고, 가질 자격도 없는 그것.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타겟이 술잔을 쥔 채 제 고갤 돌린다.)
그것만 마시면, 보내주세요. 다른 손님도 절 부르세요.
(마치 돈에 미쳐서 그렇다는 듯, 덧붙힌다. 팁같은 거 필요없음에도. 제가 두 손을 내밀자, 타겟이 고갤 젓곤 저를 무릎 꿇린다.
“토끼는 앞 발만 있는 것 아니었나? 얼른 마셔야 보내주지 응?”
한숨을 삼키며 타겟을 올려다보면 높이가 참 묘하기도 하지, 허나 이 익숙한 손님에겐 의도한 것이겠다. 이내 제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혀 술을 천천히 따르기 시작한다. 맛이, 조금 이상한데. 그런 생각을 하기엔 이미 입 안을 가득 채우고, 한두 방울 넘치기 시작한 터라, 목구멍너머로 삼킬수 밖에 없었다. 볼을 타고 술이 흘렀다. 마치 술이 아니라, 다른 액이라도 되는 양 느릿하게.)
(순간 레오의 손길에 정신이 팔렸던가. 어느새 넌 타겟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속이 덜컹 내려앉는다. 저가 우려하던 상황까진 아니었으나,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려 타겟의 다리를 짚는 네 모습을 보고 직감적으로 머리에 적색 경보가 울렸다. 네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걸 보고 레오가 못 참고 제 목을 당겨 입을 맞춘다. 아냐. 고개를 뒤로 물려 순을 떼어낸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미안. 재미가 없어졌어.
(매정한 투로 짤막하게 던지곤 그 자리를 벗어난다. 뚜벅뚜벅 타겟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린다. 너를 더듬거리느라 정신이 팔린 중년의 남성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여기서 만나뵙게 될줄은 몰랐네요. 국회에서의 연설은 잘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팬이셔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학교의 실험은 여러 흔적을 남겼다. 제 함묵증이 대표적이었고, 그들은 실험실 토끼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저는 약물 내성은 무슨, 더 빠르고 확실하게 먹히도록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적확한 실험 기록을 남기니까.
알코올 농도는 잘 조절되고 있으니 남는 것은 약물 뿐이었고, 물론 이런 약을 알고 있었다. 처음은 어디든 데려가기 쉽도록 몸이 무거워지겠지. 무릎을 짚는 제 팔꿈치가 훅 꺾이면, 타겟이 저를 들어올려 허벅지 위로 원위치시킨다. 기분이 정말 더러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만다.
그러니 그 혼몽한 기운에 당신이 보이고 들리면, 제 간절함이 만든 환상인가 의심할 수 밖에. 남의 품에 안겨서 올려다보는 당신은 정말 이상했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도, 서러운 기분도, 길을 잃은 듯한 기분도 들었으니.)
저..
(잘했어요? 형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입술조차 무겁게 느껴져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묻지 못할 질문이었다. 물어봤자 무엇하나. 그래도.. 그래도 임무 300% 달성했는데. 셔츠, 허리띠, 그리고 신발 밑창까지. 위치 추적기며 도청장치를 주렁주렁 매달아뒀는데, 비록 저까지 매달 줄은 몰랐지만. 약의 기전은, 제가 아주 잘 알았다. 목석같은 사람을 안고 싶어하는 이는 드물테니 이 다음은 뻔했다.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그에겐 선택지조차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너의 모습을 힐끔 내려다본다. 저 아닌 품에 축 몸을 늘어뜨리고 달뜬 표정을 짓는 모습에, 하악 각에 조용히 힘이 들어간다. 속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제게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저 사내의 손아귀에서 사탕을 빼앗는게 급선무다.
"누구신가? 보아하니 기자는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의뭉스러운 눈길로 묻는 말엔 미소를 더욱 짙게 내보인다.)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우선 의원님 당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그룹 중 모 기업의 차기 회장, 이라고만 해두죠. 이런 곳에서 명함을 까면, 피차일반 곤란하지 않습니까. 일터도 아닌데.
(구각을 비틀어올려 하하 웃어보이자. 그제서야 술이 어느정도 오른 그가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뒤늦게 제 손을 덥썩 잡아 흔드는 두터운 손이 꽤나 거칠다. 술 한잔 따라드려도 되겠냐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귀한 집 자제분이셨구만. 이 리조트 라인에 여러 기업의 지분이 있다는 걸 깜박했어. 그래, 아버지가 팬이라고 했지? 요즘 화두인 '프로젝트 노바' 발표를 들으셨나보군.")
센티넬들의 이능 억제장치 의무화 정책 말씀이시죠?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줄 하나의 열쇠라고 생각하셔요. 실현 시킬 기술력은 다 갖췄는데, 여론이 무서워서 시도를 못 하고 있다고.
(제게 건네받은 술잔을 잠시 내려둔 그가, 우리 도련님도 한 잔 같이 해야지, 하며 빈 잔 하나를 끌어와 채워준다.
"잘 아는군. 이미 여러 기업은 우리의 쪽으로 우세해. 지원 사업의 예산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목표 금액을 넘어선다네. 자네도 아버지와 같은 의견이겠지?")
아니요,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단호한 음성에 우뚝,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던 그의 손이 멈추고, 미소가 흐려진다.
"뭐라고?"
그럼에도 저는 태연히 웃으며 술잔을 먼저 들이키기나 했지만.)
저희 아버지는 노망 나셨어요. 이렇게 펑펑 놀아재끼는 아들에게 회장 자리를 급하게 넘길 정도로요.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농담처럼 웃으며 손을 들어 살살 저어보이면 상대의 미간 마저 좁혀지는 듯 보였다.)
좋죠. 보수당의 표를 받기엔 그만한 정책이 없거든요. 딱 우리 사회가 필요한 거예요. 정치가로서 얼마나 용기 있는 한마디였습니까. 범죄율도 줄어들 거고, 영웅노릇 하는 자경단도 사라지면서 사회 전반적인 혼란이 사그라들고, 이른바, 세계 평화죠. 근데 이거, 너무 쉽지 않아요? 너무 쉬워서 말이 안돼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설 젓는다. 울그락 불그락 한 표정을 보아하니, 속을 거의 다 긁어놓았다. 이제 몇 마디만 더 얹으면.)
국회의 의석 몇 개는 이미 센티넬 의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반인 의원들도 많은 이능력자 자녀분들을 데리고 계시고요. 불과 반세기만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달리, 저 같이 새파랗게 어린 사람들은 배척이 아니라 화합이 답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요.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절반을 적으로 돌리시는 셈인거죠. 그럼 나머지 절반의 표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만큼 싸움에 자신이 있으신겁니까?
("...그러면, 자네는 나와 반대 입장에 서겠다는 거군."
얼굴을 굳히고 그리 말하는 사내에게 서글서글 웃어보이며 에이, 왜 이러실까, 하는 등의 넉살을 툭 던진다.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툭 치기까지.)
아니요, 제가 뭘 알겠어요. 이렇게 술에 절어선, 어리고 철 없이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죠. 솔직히 의원님이 지금 당장 저를 잘 설득 시키기만 하신다면야, 바로 입지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저야 뭐든 재미있으면 됐으니까요. 회장 노릇이 별겁니까. 도박 한번에 기업 지분의 절반을 날려먹는게 요즘의 어린 CEO 아닙니까.
(의원님이 그렇게나 승리에 자신이 있으시다면. 목소리를 낮춰 거기까지 말하면 그의 마음이 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타겟의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가 나오자, 이미 저는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미있군. 자네 말대로 현 세계는 일반인이 반, 이능력자 반이야. 이것만큼 승리를 점 칠 적당한 도구가 없지. 이거 어떤가. 머리가 나오면, 프로젝트 완수까지 필요한 남은 지원금을 지금 이 자리에서 백지수표로 쓰고 가게. 차기 회장으로서의 말 한마디는 그 정도 결과는 예상해야 하는 걸세. 자네가 이 곳에서 하루밤 사이 쓸 술 값을 생각하면 그리 큰 돈도 아닐테지? 그리고 꼬리가 나오면,-")
저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하얀 머리의 바니보이를 향해 턱짓한다.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타겟을 보고는 여전히 가벼운 웃음을 실실 흘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저 게임일 뿐이잖아요. 쥐꼬리만한 공무원 월급을 털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아까부터 저 아이가 눈에 들어왔었거든요.
("허, 애초에 그런 시덥잖은 이유에서 내게 다가왔던건가?")
그건 아닙니다.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을 지지하시는지에 대해 궁금하긴 했거든요. 싫으시면 게임 물리죠.
("무슨 소리, 나야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가 예고 없이 동전을 손 위로 튕긴다. 팅- 맑은 소리와 함께 솟아오른 동전을 진득하게 두 눈으로 따라간다. 한번, 두번, 운명을 정할 동전이 슬로우모션처럼 허공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 그리고 테이블 위로 떨어져 두어번 구를 때 까지 지켜본다. 이 정도는 주머니 안의 주사위를 굴리지 않아도 무제 없었다.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위를 보인 면은...)
(당신이 눈길을 끌어준 덕에 욕심껏 주무르던 손이 멈춘다. 들러붙었던 땀이 쩍하고 갈라지며 떨어지는 것이 당신의 허리짓과 달리 정말 싫어서, 눈동자만 굴려 당신을 올려다본다. 제 몸값이 그만한 거금이라니. 오늘 참 별 일 다 겪는다, 싶어서 구각을 비틀어보면, 조금씩 몸에 힘이 돌아온다. 첫번째 약효가 서서히 거둬지고 있다. 당신은 보았을까, 그 자조를.
타겟이 던진 동전이 허공을 유영하다가 테이블로 뚝 떨어진다. 머리와 꼬리. 꼬리와 머리. 매끄럽게 회전하는 그것이 한 사람을 위한 기요틴의 칼날이라는 사실을 정작 목이 걸린 타겟만 몰랐다. 동전이 떨어지는 보잘 것 없는 소리는 가득 울리는 스피커에 묻힌다. 사람의 머리가 잘리는 소리가 관중들의 함성에 묻히고 남는 것은 꼬리라기엔 보잘 것없는 사람의 몸뚱아리 뿐이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당신의 테이블에 돌아오며, 힘이 빠진 발에서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하이힐이 바닥에 남겨졌다. 어쩌자고 그런 걸 걸어요? 눈으로 물었다. 만에 하나라도 지면, 그 금액은 어디서 마련하려고. 만에 하나라도 당신의 이능을 아는 자였더라면 당신은 무슨 위험을 감내하려고. 우리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나. 그냥 모른 척하고, 버려둔 채 떠나도 되는, 그런 남같은 사이. 나같은 게 뭐라고 그런 리스크를 감내하나 당신은 그때도, 지금도.)
…조금만, 요.
(당신의 허벅지에 제 양 허벅지를 올려두고 당신의 목덜미에 제 고개를 묻는다. 실은, 힘들었으니까. 보자마자 이렇게 안기고 싶었는데. 갈증과 약기운에 갈라지는 목소리와 함께 당신과 같이 술향이 났다. 약기운이 남아있다는 핑계를 대며, 당신의 체온을 누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고.
“쿠키, 오늘 팔리지 않으면 누나랑 밤 샐 각오해. 알았니?”
거봐. 당신의 품에 얼마나 안겨있었다고, 부드러운 채근이 귀를 울린다. 어차피 마지막 테이블이었다. 우리의 임무도 끝이 났으니까. 다른 약효가 제 몸을 갉아먹듯 서서히 간지럽혔다. 당신 탓인 듯, 약 탓인 듯, 혹은 조명 탓인 듯, 어느새 붉은 기운이 목을 타고 서서히 가슴을 물들이며 내려가고 있었다. 당신의 목덜미에서 고갤 떼어내기 전에 속삭임을 남긴다.)
적당히, 룸으로.., 알았죠?
(이대로 데려가면 너무 뜬금없어 보일까봐,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느릿하게 일으킨다. 양 무릎을 세워 당신을 가두고, 마치 삽입이라도 하듯 당신의 허벅지 위로 차근차근 제 다리를 벌려 내려앉는다. 왜인지 여우가 했던 짓과 비슷하지. 근데 전 테이블은 싫었다. 아까 앉아보니 차갑기만 하던데. 당신의 양 손을 찾아 붙잡고 제 허벅지를 쓸어올린다. 망사가 반지에 걸리는 작은 떨림조차 느껴질 만큼 느긋하게. 하지만 이것만으론 당신이 저를 사기엔, 설득력이 부족하잖아. 당신의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었다가 입을 벌려 모두에게 당신의 손가락이 붉은 살덩이에게 어떻게 놀아나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험핑이라도 하듯 묵직해진 제 아랫도리를 당신의 바지 위에 부비적거리면, 칼라에 둘러진 붉은 리본이 나풀거렸다. 거친 정장의 천에 충분히 문질러진 허벅지 안쪽 역시 먹기 좋게 익고 말았다. 과일에 흠이 나면 과즙과 그 향에 시선이 가는 것처럼, 이미 남이 먹고 있는 쿠키인데도,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진심과 풋내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잠시 몰렸다.)
(너를 온전하게 품에 안고서부터는 네 얼굴도 다른 이들로부터 가리니까. 연극용 가면을 살짝 풀어내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너를 담는다. 괜찮은가, 어두운 조명에도 붉은 빛을 띠는 뼘을 손으로 살살 쓸어보고. 그나마 다른 이의 품에서 약효의 피크가 오기 전에 널 거둬온건 다행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곤란하기도 했다. 그야 우리는... 너와 나는.)
...
(천천히 제 다리 위로 엉덩이를 내리는 너를 올려다보며, 점점 드러날법한 긴장을 애써 표정 뒤로 꾹 숨기고 마른 침을 삼킨다. 눈으로만 한참을 탐하던, 이제는 제 것이 아닌 말랑한 다리 살을 손 끝으로 꾸욱 힘주어 쓸다보면, 술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코 끝에 걸린 너의 향과 피부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어지럽다.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텐데. 너는 내가 싫음에도 미션의 완성을 위해 이다지도 몸을 부딪혀 오는걸까. 그 속을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위로 느른히 젖혀 너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엉덩이가 왼쪽 다리에 수납된 것을 꾹꾹 눌러대기도 전에 이미 단단하게 모양을 잡고 있었던걸 너는 알까. 한 손으론 얇은 허리를 감싸안아 찧던 방아질을 멈추게 하고, 한 손은 너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향하더니 가죽과 다리 안쪽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곳의 여린 살을 손 끝으로 쓸어댄다. 붉게 달은 것이, 한 입 베어물고 빨아먹으면 어떤 맛이 날까.)
쿠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가까이 다가온 귀에, 다른 이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이며 그 부근의 귀와 목덜미에 쪽쪽 입맞춘다.)
흐으…,
(약효를 애써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당신이 제 허리를 감싸 안으면 그 체온에 달은 몸이 더욱 뜨거웠다. 기어코 더운 숨과 섞여 나간 신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는다. 당신이 멈춰 세운 탓에 몸을 바투 붙힌 채 허벅지에 눌러앉아버렸다. 당신이 제 살을 달래주려는 듯 부드럽게 쓸어도, 예민해진 몸은 움찔 떨며, 제 꼬리를 들썩거렸다. 제 엉덩이에 꾹 눌린 당신의 것을 머릿 속으로 아주 상세히 그리고 있는데.)
왜, 저는 안되나요?
(당신의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한 건데. 왜 그 여우는 되고 저는 안되는가. 나는 당신의 마음도, 몸도 허락받지 못하는 건가? 당신이 느슨하게 열어둔 목덜미를 따라 혀를 미끄러트린다. 당신, 이거 좋아했잖아. 두 몸 사이에 갇힌 손이 조금씩 당신의 셔츠를 젖히고, 정말 물이라도 마시듯,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쇄골 우묵한 곳을 할짝거린다. 어느 순간 사라진 환청이 제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는 너무 잘 알았다. 저는 그만큼이나 당신이 고팠는데 당신은 저라서 안되는 거면, 정말로 제가 설이라서 안되는 거면, 오늘 밤은 호스트 쿠키가 되면 되는 거잖아. 이번엔 제가 연기를 하면 되는 거잖아. 슬쩍 체중 알코올 농도를 조절한 채, 고개를 떼어내고 당신의 볼을 제 혀로 낼름 훔친다. 달달 떨리는 손이 당신의 귓볼을 만지작거리고. 목소리를 조금 높혀 교태를 섞는다.)
자기야, 후회하지 않겠어?
(나 제법 인기 많던데. 말 끝을 흐리며 제 가슴팍에 무수한 돈뭉치들을 남는 손으로 쓸어본다. 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만 골라서.)
(목덜미를 따라 축축한 혓덩이가 가슴팍으로 미끄러져내리자 검은 구둣볼이 불룩하게 부풀었다 내리길 반복한다. 지금의 넌 약에 얼마나 취한건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할까. 맨 정신을 되찾으면 분명 너는 부끄러워 할텐데. 어디까지 너의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해서, 그 이상의 진도를 빼지 못하고 가만히 등어리를 쓸기만 했다. 다시 볼을 타고 혀를 놀리는 애무에 흣, 하고 새어나갈 뻔한 신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사타구니의 살결을 꾹꾹 눌러 쥐는데, 일순간 바뀐 너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표정이 변한다. 고개를 든 저는 다시 가면을 눌러 쓴 채였다. 겨우 그것 뿐인데도, 모든 갈등이 조용하게 사그라드는 것이 야속하다. 이 순간 만큼은 너에게 상처 준 펠이 아니어도 되니까. 지저분한 감정이 뒤엉킨 연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너를 산 주인으로서 마음껏 몸을 탐닉해도 되니까. 검은 욕망이 구속에서 풀려나자 더 이상 묶여있길 거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에도 난 이 가면을 쓰고 있었는걸.)
...그럼 어디, 날 후회하게 만들어봐.
(담담한 목소리가 네게 지시했다. 너가 알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까 전에 타겟 앞에서 보였던 비스듬한 미소와 함께. 턱을 손으로 움켜잡듯 쥐고 제게 끌어와 입술을 삼킨다. 그토록 기다리고 꿈꿔온 말캉한 순에선 술과 약의 냄새가 풍겼다. 이건 너가 아니야. 내가 아는 설이는, 이렇지 않아. 그럼에도 그림자와도 같은 하얀 머리의 네 모습이나, 간간히 코 끝을 스치는 너의 살내음이 본능적으로 널 기억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몸은 더욱 흥분하게 된다. 혀를 길게 밀어넣고 뽑아먹을 듯 점막 구석구석을 훑어 밀렸던 갈증을 채웠다. 타액 하나라도 밖으로 흐르지 못하게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곤, 하이레그 밖으로 튀어나온 엉덩이 살 위로 손을 쫙 올린다.)
엉덩이 마저 흔들어야지, 쿠키야.
(당신의 미소와 가면에 멈칫거렸다가 그대로 하악을 잡혀 입술이 맞물린다. 습관처럼 당신의 목덜미에 감싼 제 팔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입맞춤에 힘이 풀려 손가락을 세워 어깨를 따라 흐르다가 셔츠 가터에 걸렸다. 앓는 소리조차 전부 삼키며 거칠게 밀어붙이는 힘에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가 밀린다. 호흡이 부족하지 않게 조절하며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살살 다뤄달라는 듯 당신의 볼을 부드럽게 달랬다.)
하아.., 거친 주인님이네.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치면, 번진 립스틱이 분홍빛으로 흐린 자욱을 남겼다. 그건 당신의 셔츠도, 입술도 마찬가지겠지. 하기사 마담이 센티넬이면 왜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이능만큼이나 자신있어 했던 화장은 당신의 키스 한번에 무너지고 만다. 당신의 양어깨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앞뒤로 뭉근하게 움직였던 이전과 달리 정말 토끼라도 된 양 콩콩 위 아래로 몸을 들었다 내린다. 당신과 배를 맞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비록 제가 경험이 많은 게 아니라도, 당신과의 경험은 많아서, 어딜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도는 모르지 않았다. 저와 진득하게 몸을 섞으면서도 저를 그리길 바라는 이 모순은, 쾌락에 불살라버리자. 약기운에 갈증이 점차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단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랫구멍을 벌름거리고 있기 때문에 주는 힘이 당신의 손바닥을 타고 흐르고, 당신의 불룩한 허벅지에 부딪쳐 떨리는 살결의 진동이 둔중해진다. 성음을 옅게 흘리다가도 당신이 이정도에 저를 집어삼킬 것 같진 않았다. 반면 저는 더 원했다.
아쉬운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듯, 당신을 유혹하는 것이 제 역할이기에. 가슴을 타고 흐른 손이 셔츠위로 유두를 괜히 톡 튕기고, 허리춤의 허리띠를 달그락거린다. 풀려는 건 아니었다. 마치 짖궃은 장난인 양 두 손가락을 벌려 그 사이에 바지 위로 충분한 양감을 끼워넣곤, 위에선 동그랗게 원을 만든 손가락이 입술 앞을 왕복한다. 볼에 혀를 밀어넣어 제 손가락 사이의 양감을 표현했다가, 혀를 내밀어 허공을 핥고, 무언가 빨아올리듯 볼을 홀쭉하게 만들었다가 부풀이고. 화장으로 붉은 눈가 때문에 버거운 것을 삼켜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 짓거릴 하면서도 흔들리는 토끼귀는 높이 솟아있었음으로, 그 음란한 행위에 이전에 붙었던 시선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두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토끼로 보이겠지만, 제 애무 습관을 아는 당신은 알아볼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지금 누구의 것을 빨고 삼키는지.)
...하.
(이런 건 가르져 준 적이 없는데. 실소를 흘리며 제 것을 꿈결처럼 핥아올리는 시늉을 진득하게 관람한다. 길다란 손가락 뒤로 붉은 혀가 얼핏 드러날 때마다 네 손에 끼워진 바지 아래 성기가 꿈틀거렸다. 이미 속옷의 끄트머리를 적신 선액이 바지를 눅눅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러고보니 다리를 만질 때 평소 손에 쓸리던 이물감이 없었다. 투둑, 뜯어질 것 같이 망사 스타킹 위를 쓸던 손이 사타구니를 파고들어 스타킹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넣는다. 여기도, 치골과 가까워 음모가 만져져야 할텐데. 그렇다면 너의 성기부터 애널까지 이어진 그 곳도... 허옇고 보드랍게 만져질 그 모습을 미리 상상하곤 느른한 한숨을 푹 내쉰다. 보이지 않는 성기를 빨던 너의 턱으로 손을 뻗더니 엄지 하나를 혀를 가르며 밀어넣는다. 마치 제 것을 들이기 전에 검사라도 하는 양.)
누가 널 이렇게까지 만든거야.
(실력의 출처를 묻는 듯한 중의적인 물음은 어떤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볼만한 눈요기로 저를 즐겁게 한 것에 대한 상으로 다른 한 손은 불룩하게 솟은 가죽 옷 위를 뭉근하게 문질러주며, 애가 탈 약기운을 서서히 덜어주었다.)
으응..,
(당신의 지분거림이 어찌나 저를 애타게 하던지 작은 방아짓을 멈추고 앙탈을 부리며 비비적거린다. 몸에 들러붙은 가죽이 숨을 들이킬 때마다 그 윤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가, 숨겨준다. 당신의 엄지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제 입을 가득 벌리면, 아, 하고 보여주고. 이내 무언가 끈적거리는 것을 꿀꺽 삼키듯 움직이는 혀가 엄지를 살짝 밀어낸다.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붉고 좁은 통로가 살짝 좁아졌다가 넓어지는 것이 화려한 조명 아래 번들거렸다.)
흣, 예쁨 받고 싶게 만든 사람, 있어.
(츠읍 소릴 내며 엄지를 빨던 그가 당신을 물은 채 답변을 내놓았다. 구각은 움직이지 않고 눈가에만 가벼운 웃음기가 묻어나는 게, 그 희미한 웃음은 또 설이 같았다. 수줍은 듯 양 뺨과 귓가가, 약효와 기대감에 슬며시 떨리기 시작한 허벅지가 선홍빛으로 물든 것도. 그런데 당신의 손을 더 잘 느낄 수 있게끔 허리짓을 하며 손바닥에 제 좆을 부비는 것은 또, 쿠키였다. 제 상체를 당신의 가슴팍에 바스락 소릴 내며 붙이고 당신의 어깨에 제 양 팔을 올리면 흐릿하게 반짝이는 제 눈이 당신에게 훅 가까워졌다. 원래는 늘 제가 당신의 머릴 쓸어넘겨야 보였는데. 이젠 모두가 볼 수 있네. 괜한 아쉬움에 풀린 몇가닥을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려보고 눈꺼풀을 내려 당신의 입술을 빤히 보면, 속눈썹이 가는 음영을 만든다. 코 끝이 스치는 그 거리에서.)
마음에 들어?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는데. 닿일 듯 한 거리에서 숨결과 함께 속삭이곤 웃음을 흘린다. 엄지로 하순을 죽 긁어 빼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엄지 끝과 이어지던 은실이 희미하게 끊어진다.)
예뻐.
(사랑스럽고. 그러나 그런 말 따위는 짤막한 키스로 대신한다. 아직 저들과 우리 사이엔 막을 내리지 못한 커튼이 있었으니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너를 기회 삼고 쾌감을 느끼고 있는 제 몸에선 스멀스멀 죄악감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서 장소를 바꿔야 했다. 이 터무니없는 허울을 번명 삼고는 아까의 타켓과 다를 바 없는 짓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저지를까봐. 그건 가면을 벗는다 한들 없던 일처럼 사라지지 않으니까. 마담을 향해 손짓하곤, 무언의 교류를 주고받는다. 그러면 직원이 와서 테이블 위로 룸 키 하나를 올려주고 간다. 제게 푹 기대어안긴 너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묻는다.)
가자. 걸을 수 있겠어?
(당신의 속삭임에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고개만 기우뚱한다. 나한테 당신 말고 예뻐해줄 이가 또 어디있다고.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멀쩡히 호흡하는 이는 당신 뿐인데. 아. 이젠 당신조차 내 손에 없지. 약에 취했음에도 당신의 입술이 다가오면 얌전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 손등에 기대었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단순 약 탓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다리 사이에 앉아 몸을 옆으로 돌려 제 발을 당신에게 보여준다. 우습게 하이힐이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탓에.)
자기가 안아줘.
(스타킹에 쌓인 맨발을 보곤 피식 입꼬리를 올린다. 승낙처럼 볼에 입을 맞춘 뒤엔 나머지 한 쪽 발로 손을 뻗어 하이힐을 벗겨준다. 카드키를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네 오금 아래 팔을 넣어 너를 품에 넣었다.)
꽉 잡아 공주님.
(술에 취하긴 했으나 걸음걸이를 흩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바 공간의 구석진 안쪽으로 들어서서 카펫 위를 걷보면 룸이 줄지은 복도가 나온다.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먹먹하게 뭉개지는 대신, 어렷품이 방음이 약한 문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교성이 간간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말끔한 시설 속 지저분한 사람들. 그 중 하나가 되어 역활을 완벽히 수행해낸 우리의 앞에 커튼이 천천히 내린다. 잠시만. 아까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돌아온 저가 너를 잠시 문 옆 벽에 조심스럽게 세워둔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카드키를 꺼내 도어락에 가져다 대고.)
속은 좀 어때.
(당신의 걸음걸이에 허공에 떠오른 두 발이 가볍게 부딪친다. 차라리, 정말 토끼라도 되었음 좋았을텐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당신의 품으로 하얀 공이 되어 도망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상념이 부서진다. 당신이 바닥에 내려주었음에도,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라, 낯설기 그지 없는 제 발을 내려다본다. 물음에 시선을 돌려 도어락을 본다. 당신의 손짓없이도 부드럽게 돌아가는 것이, 제 존재를 잊었냐고 하는 것 같아서.)
참아보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그때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차라리 광기에 휩쓸려 우리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근데 당신은 왜 그렇게 다정해. 아예 싫어할 수 조차 없게. 인터미션 중 백스테이지에서 호흡을 고르는 양, 제 목까지 쳐오르는 화마를 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이걸 놓아버리면, 당신과 끝내주는 밤을 보낼 순 있겠지. 도통 풀 수 없는 매듭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될 거야. 하지만 이후 다시 엮는다해도 같은 관계가 될까. 우리 사이의 부유물이 전부 침전한 듯, 가라앉은 눈이 당신을 본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후회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