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두 사람의 못다한 마음을 풀어내려면, 얼마나 긴 밤이 필요할까. 서로의 마음을 당겨오고 확인하며 올 것 같지 않았던 밤이 천천히 흘러간다. "..." 한편,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 유일하게 등이 켜진 파티션. 그곳에는 금발머리의 사내 하나가 홀로 앉아 업무용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깔고선 신음과 야한 소음이 난무하는 대화 내용을 감상하며. 분명 김 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인이어의 전원이 한 번 꺼지긴 했다. 본부에 앉아 내용을 듣던 이들은 미션 성공 여부를 확인하고선 이후 낯뜨거운 내용 따윈 더 엿들을 필요 없다며 자리를 하나둘씩 떴고. 그러나 도원은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테크직을 하나를 붙잡아 원격 시스템으로 다시 마이크를 복구시켜달라 요청했다. 의아한 표정의 사내를 설득할 수 있던 건 평소에도 주변 사람을 휘어잡는 그의 매끄러운 혀와 넉살 덕분이었다. "누군가 하나는 남아서 일이 틀어지지 않는지 확인해야죠." 사르르 웃으며 그가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접촉을 통한 최면과 정신 회유가 그의 특기였으니. 그러니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가 지금 이런 음침한 낯빛으로 관음하며 홀로 사무실에 앉아 스스로의 몸을 어루고 있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겠다. 유독 한 사람의 목소리가 헤드폰으로 들려올 때마다 손짓을 빨리 하던 그가 읏, 하는 옅은 목울림을 끝으로 움직임을 멈춘다. 조용히 울리는 가쁜 숨결. 손은 휴지곽을 향해 뻗친다. 펠. 너를 갖고싶었는데. 괜한 미션 하나 때문에 길을 한참 돌아가게 됐네. 행운은 원래 손에 쉽게 들어오는 법이 없다지만. 흥분이 걷혀 굳은 얼굴이 아래를 꼼꼼히 정리하고 바지 지퍼를 죽 올린다. 귀찮아진건 아쉽다. 하지만, 여전히 못 할 건 없었다. 그런 여유가 그를 쿡 웃게 했다. 모니터에 띄워진 김 설의 인사과 프로필과 여러 정보가 적힌 창을 닫고, 기록을 지운다. 헤드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아무도 없었던 것 처럼, 사무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오랜만의 잠투정을 부리며, 부스스 일어나려는 당신을 붙잡고, 습관처럼 허벅지를 올려놓으며 가지말라고 웅얼거렸다가 진득한 아침을 맞았다. 분장은 전용 약품으로 지워야했지만, 당신의 흔적들은 시간으로 지워야했기에, 마담이 올려준 셔츠와 바지를 입었음에도 목 부근이 얼룩덜룩했다. 당신이 준비할 적에,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톡톡 두들긴다. 기묘한 일이었다. 기록 삭제 요청이 있어 확인해보았더니 우리의 어젯밤 녹음본이질 않나. 저의 이런저런 정보이질 않나. 뱀굴에 뱀이 아니라 미꾸라지가 한 마리 있는 모양인데. 혹시 모르니 이런저런 조치를 해두고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당신의 뒤를 폭 안는다.) 여기, 다 지워졌네요. (당신의 바지 앞섶을 손끝으로 둥글게 그린다. 분명 밤에만 해도 허연 자욱들로 엉망이었는데, 세탁 서비스를 맡겼더니 전부 지워졌다. 셔츠의 주름들도. 다른 곳에 튀어버린 정사의 흔적들도.)
(뒤에서 안아오는 따스한 온기를 향해 돌아보며 미소짓는다. 정말 네 말대로 말끔해 진 것이 마치 어제의 일이 그저 한여름밤의 꿈 같지. 그러나 서로의 울긋불긋한 마킹이나 그 안에 새긴 마음은 그것을 반증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붙은 머리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고개 돌려 볼에 쪽 입맞춘다.) 간지러워. 자꾸 그렇게 만지다간 밖에서 대기중인 차를 보내야 할거야. (입꼬리 올리며 속삭였다. 마저 손을 씻고, 욕실에서 나와 정장 재킷을 걸쳐 입는다.) 아까 무슨 연락이라도 받았어? 표정이 심각해보이던데.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뻑적지근한 허벅지와 허리를 생각하면 별로 좋진 않겠지만 말이다. 당신의 이어지는 물음에 곰곰히 생각하는 낯이다. 더는 숨기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니, 딸기맛 립밤을 바르며 순순히 털어놓는다.) 누가 우리의 밤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분명 연결을 끊었는데, 몰래 엿들은 걸 보면. (수건을 들어 당신 손의 물기를 말끔히 닦아내고, 양 손등에 쪽쪽 제 입술을 뭉개면, 옅은 붉은 색이 남는다. 립스틱도 아니니, 살짝이라도 스치면 없어질 것 같은 흔적이.) 임무 보고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할 거에요. 만약에 지워져있으면... 이번엔 정말 안 풀어줄거니까.
누가 우리 둘을 엿들었다고? (미간 사이 옅게 주름진다. 작게 침음하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께름칙한 직감은 제게 이름 하나를 내놓았으나 섣불리 그것을 입 밖에 낼 순 없는 성정이니. 너가 없는 며칠간 본부 내 많은 사람들이 제게 찾아와 그 빈 시간을 대신했다. 개인적인 부탁이나 작은 호의, 혹은 호감을 들어주다 보면 가까워지는 이는 생기기 마련이었고, 한동안 마음이 허했던 펠은 그것을 '친구'와 '동료'의 선상 안에 두었다. 이능력이 발현 될 때부터 거짓 애정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 그는, 누군가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너, 혹시 이도원이라고, 우리 부서긴 한데. 사이킥 센티넬. 혹시 알아?
(고갤 작게 끄덕인다. 작게 머금었던 미소가 서서히 거둬지는 것은, 당신의 반응에서 심상치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손아귀에 쥔 당신의 손 안 쪽을 반지 대신 깔짝거린다. 당신이 그 사람을 찍어낸 것에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마땅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조용히 머릿속 커서가 딸깍거리고, 그 사람의 파일을 옮긴다. 요주의에서 위험 폴더로. 나의 죄많은 연인은 저로 모자라 대체 누구를 곁에 두었던 걸까.) 제게 접근할 거라 보세요? 형이 아니라?
...모르겠네.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가끔씩은 영 속을 모르겠어. (마치 두터운 가면을 여러겹 쓴 것 같지. 저도 그런 편이었지만, 너가 제 맨 얼굴을 들춘 이후부턴 아니었다. 손에 잡힌 너를 끌어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양 마디마디에 잘게 입맞춘다.) 내가 잘 말해볼게. 혹시 몰라. 미션 끝까지 지켜보라고 지령이라도 내려왔을 수도 있고
(저도 모르게 새어나갈 뻔한 비웃음을 참는다. 동류는 서로를 알아본다고, 어쩌면 동족 혐오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감각이 제 몸을 기어오른다. 손이 살며시 떨리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물고 핥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느라. 기다려, 아직 때가 아니잖아, 하고 당신이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아서.) 뭐가 어찌되었든, 형이 한 말만 잊지마세요. 오직 형만 저를 부릴 수 있다는 말. (몸을 낮춰 당신에게 마음껏 안기며, 되새겨준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당신이 각인이라도 하듯 비슷하게 말했다. 쿠키로 부르든, 강아지로 부려먹든, 오직 당신만이 제 목덜미를 쥘 수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먼저 보고가 끝나면, 이번에도 집에서 얌전히 기다릴테니까요. 너무 늦진 말고.
(오직 저만이 너를. 그 한마디에 다른 이가 네 몸에 남긴 흔적들이 모두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다시 품에 들어온 너를 꾹 껴안는다. 이젠 놓지 않을거라 다짐하며. 달님이 내려준 동앗줄이 썩은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제 목숨을 그곳에 기꺼이 걸어 너의 사랑을 향해 오를 것이다. 그 전에 밑에서 쫓아오는 상대를 먼저 대면해야겠지. 그것이 누이일지, 혹은 거죽을 뒤집어 쓴 호랑이일지는 벗겨봐야 아는 법. 너와 함께 본부에 도착해 업무 보고를 하고, 시간이 조금 뜬 어중간한 오후시간에 이른다. 그가 종종 시간을 보내곤 하던 건물 뒷편으로 향한다. 작은 화단에는 각종 알록달록한 꽃무리와 덩쿨이 푸릇하게 잎사귀를 떨치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니퍼를 들고 잔 가지를 다듬어주는 건, 다름 아닌 이도원이었다. 기척을 느끼고 누구인지 뒤돌아 확인도 하지 않은 그는, 발걸음만으로도 대번 저를 알아본다. "잘 다녀왔어? 재미있어보이더라." 부드러운 웃음소리. 그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다가간다. 도원아. 아이를 혼내기 전의 선생님처럼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보며.) 혹시 녹음본 끝까지 들은게 너야?
(실은, 오늘 하루는 이도원에게도 고단한 하루였다. 펠의 물음이 들리면, 다른 이의 목소리와 겹쳐 저도 모르게 커다란 꽃의 봉오리를 툭 잘라내고 만다. 마치 사람의 머리처럼 여리고 탐스러웠던 꽃잎이 덩어리채 떨어지고, 흙과 뒤섞여 더러워졌다. 그는 그 꼴을 보며 잠시 회상했다. ‘도원씨, 제 1 소대 정보장이 호출했어요.’ 설이 본부장에게 보고를 마친 이후, 가장 먼저 한 짓은 그 사람의 낯짝을 보는 것이었다. 도원은, 그의 사무실을 정말 기묘하다고 밖에 평할 수 없었다.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곳. 어떻게 햇빛을 받지 않고 숨을 쉬는 생명이 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만큼 정오임에도 태양으로부터 숨어버린 듯 어둑한 기계더미 한가운데, 설이라는 앳된 정보장은 수많은 모니터의 벽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도원은 정말이지, 그 정보장조차 생명이라 칭할 수 없었다. 차라리 저 기계의 일부라고 해야할 정도로 무감각해보였으니 말이다. 해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대한 전자문서들 앞의 손이 닿지도 않은 키보드들이 달칵거리며 유일한 목소리를 내고, 이와 연결되어 이 넓은 방을 비좁게 만드는 본체들이 그의 숨소리를 대신 하는 것 같았다. 도원을 안내했던 1소대 정보부장이 그에게 여기 서서 기다리면 된다며, 바닥에 그려진 작은 사각형을 가르켰다. 설이 상당한 컨트롤 프릭이라는 걸 알아챈 정보소대원들의 배려였지만, 도원에겐 계급놀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짝만 옆으로 고개를 틀어도 그를 발견해야할 설이 미동도 없이 업무를 계속할 뿐이었으니까. 저보다 어린 것이, 저보다 더 많은 권한을 틀어쥐고, 저는 알지도 못할 행위를. 심지어 본인이 저를 호출하고서 이리 세워두는 것의 의도가 뻔하지 않은가. 적어도 이 지부에서는 모두의 호의를 샀던 도원에게 이런 무시는 아마도 처음이려나. 도원이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자, 설의 눈동자가 굴러 도원을 담았다. 고작 돌덩어리 따위를 보는 듯한 메마른 시선에 도원은 다시 입을 닫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 도원은 훔쳐보았던 설의 문서를 떠올렸다. 살인에 대해 별다른 트라우마 증상을 보이지 않아 암살 임무를 자주 다녔다지, 정부 부속 연구소 하나를 홀로 괴멸했다는 괴담도 떠돌았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도. 제 발로 뱀의 아가리에 들어온 셈일까. 답지 않게 압력을 느끼고 또다시 입을 벙긋거리자, 이번엔 외려 설이 입을 열었다. 미묘한 압박감 속 그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모든 화면이 검게 물들고, 마찬가지로 작은 빛조차 들이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도원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많던데요. 아니면, 형에게 다가가다 보니 내가 막던가요? (“정보장님,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당신의 말대로, 나는 정보장인데? 그런 낯이 훤했다. 차라리 대놓고 비웃는 게 나을 정도로, 무슨 이런 멍청한 문답이 다 있지, 그런 순수한 의문만을 띄운 낯이었다. 이 세상에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었고, 능력이 허하는 곳 내에선 그는 가히 전지한 자였다. 다시 둘 사이의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깨부순 것은 설의 나직한 경고였다.) 포기하세요. 형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답답함과 짜증이 제 입을 틀어막은 양 도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저 정보장도 마찬가지아닌가. 그날 녹음본에서 고해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자기는 뭐가 다르길래, 저런 말을 하는가. 가진 자의 여유? 연인의 경고? 어느 쪽이든 재수가 없었다. 고요하게 그런 도원의 낯을 읽어내던 설이 한숨을 쉬며 의자를 돌려 키보드에 무언가를 입력한다. 모니터 반대편, 푸른 지도가 띄워진 스크린이 점멸하고, 기하학적인 화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태양계의 공자전 궤도 같기도 했고, 알 수 없는 그래프 같기도 했다. 그걸 설이 친히 확대해주면, 일종의 3D 마인드맵과 같은 형태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고, 굳이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도-물론 도원은 그럴 수 조차 없었겠지만- 없이, 설의 태양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양이 그려낸 모든 삶들의 곡선도. 작게는 지나가다가 운의 영향을 받은 이의 인과관계부터, 크게는 그의 부모, 여태의 가이드, 그가 구해낸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펠이 만났던 이들의 모든 삶의 결과.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주인인 펠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들. 그 중심에 중력을 이루는 설의 태양. 그의 모든 매 분 매 초가 태양을 이루는 구가 되어 정리되는 화면이었다. 이에 대한 감상은 글쎄, 도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문서화 할 수 있고, 그 정도로 집착하는 것에 대해. 난생 처음 본 것에 대한, 불가해에 대한, 제가 한 것은 소꿉장난처럼 우습게 만드는 깊고 끔찍한 집착에 대한, 감상을 어찌 쉽게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에요. 포기하세요. (그게 가능했다면, 제가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연구할 일이 있겠나. 차라리, 펠이 저를 소유하는 것이 빠를 것이고, 그렇게 설은 그의 곁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를 가지기를 원할 때, 오직 저만이 그의 소유물을 자처한 자였다. 이런 것도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니던가. 그런 의심은 전날밤 그의 주인이 모두 말소해주었으므로, 이젠 일말의 망설임과 주저함조차도 없었다. 이를 드러내며 주인에게 접근하는 자에게 경고하는 것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사실 나는 형이 당신을 부르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설아, 하고 그 다정한 어조와 음색은 나한테만 향해야하는데. 생기가 피어나듯 부드러워진 설은 턱을 괴며 화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설의 목이 나른하게 늘어지며, 얼룩진 울혈이 도원에게 과시하듯 빛을 받았다. 본래의 흰 피부는 볼 수도 없고, 사람의 피부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핏기가 저런 낙인이라니. 도원은 눈을 돌려 거대한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구를 이루는 듯한 태양의 티끌만도 못한 공허를 발견했기에. 비록 도원의 재주는 접촉을 통한 정신 조작이지만, 씨앗 정도는 닿지 않아도 심을 수 있었다. 불쾌한 경고를 받았으니 답례는 해야겠다. 도원은 그렇게 상대가 듣건 말건 펠이 당신을 버린 동안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어차피 이루어질 일이었다며, 설의 무능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 속삭임이 제대로 심어졌는지는, 실은 도원 그 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내 그러했듯, 서늘한 낯으로 모니터만 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저를 고장난 라디오정도로 취급했을지도 모르고. 그 표정을 곱씹으며 니퍼를 내려놓고 펠을 웃음과 함께 마주했다. “제 1 정보장은 집으로 돌아가서 펠 너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거 물어보려고 남은 줄은 몰랐네. 어쩌지, 정보장, 조금 속상해보이던데…”)
...설이랑 만났어? (찌푸려지는 미간. 저는 이도원이라는 이름을 설에게 딱 한번 언급했을 뿐인데. 벌써 도원을 찾아와 훑고 지나갔다니. 정보 수집에 있어서 항상 빛의 속도를 보이던 너답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그걸 눈치챈 도원은 펠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다.) "그저 대화를 좀 나눴어.그도 같은게 궁금했는지 날 소환시켰거든. 근데, ..." (어후, 고개를 갸웃 돌리며 짓는 이도원의 미소는, 머쓱해보기이도, 조금은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너, 그 애한테 단단히 붙잡혀 있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펠이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었으나 왠지 그 속뜻을 이미 알고 있는지 눈동자가 불안하게 빛나고 있었다. 능소화가 사이사이 고개를 내민 담쟁이 넝쿨벽을 배경으로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본다. 한뼘이나 나는 키 차이 탓에 펠은 고개를 들어 도원을 응시했고, 도원은 그런 펠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인 그의 붉은 눈은 펠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옅은 탐욕을 띠고 있었다.) "너가 전에 나한테 말해준 그대로야. 아니, 상상 이상이던데." 그가 하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담벽에 피어난 주황색 능소화 하나를 똑 따낸다. 그리곤 그 보드라운 꽃봉오리 하나를 펠의 곱슬머리에 폭 꽂아둔다. 펠이 정원에 찾아올 때면 종종 치던 장난이었다. "너는 여태까지 너가 만난 모든 가이드를 기억해?") ... ("정보부장님은 기억하시더라. 아니, 명단이 아예 아카이빙 되어있던데.이름부터 얼마나 긴밀한 접촉을 했는지까지 전부 묘사되어있어. 넌 네가 사귀는 애가 얼마나 무서운 애인지 몰라.") 나도 알만큼 알아. 설이가 어떤 애인지는. (담담하고 침착한 펠의 목소리가 도원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도원은 펠이 불안할 때 더더욱 이런 어투를 쓴다는 점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도원이 작게 웃음 흘리며 펠의 앞머리를 살살 걷어준다. "그래? 그럼 여태 너랑 스쳐간 인원들의 말로도 잘 알고 있겠네. 몇 주 전에 김 설이 현장요원 두 명을 설이 말단 부서로 좌천시켜버린 것도 말이야. 실적이 좋았는데. 단지 입소문을 잘못 퍼날랐다는 이유 만으로. 안타깝게 됐지. " 김 설이라는 정보 요원이 펠을 이용해 승진을 할 수 있었다는 그 루머. 그것 또한 사실 이도원이 교묘하게 심어놓은 씨앗의 싹 중 하나였다. 침묵하는 펠을 앞에 두고 도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네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를 그저 행운 탓이라고 치부해선 안돼. 너가 모르게 설은 네 주변을 계속 가지치기 하고 있어." 펠의 손이 머리칼을 매만지던 하얀 목장갑을 붙잡고 저지한다. 노란 눈은 그 빛이 진하게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흑안으로 돌아올 때면 오묘하게 보랏빛을 어렷품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도원아. ...아니, 형. 그만해. 이런 식으로 선을 넘지는 말아줘. ("...펠." 이도원은 안타깝다는 양 가만히 펠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도, 지켜보고, 듣고 있다는거 알아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도원이 중얼거린다. 고개를 가까이 내린 그가 펠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핸드폰 꺼.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뱀의 혀로 속삭임을 불어넣을 적 그의 손은 이미 자연스럽게 펠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러니 펠도 홀린 듯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전원을 꺼버렸겠지.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펠이 종종 도원이와 함께 있을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고 저가 하는 행동들에 대한 일말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으니. 도원이 벽에 달린 CCTV를 흘끔 돌아보고는, 그의 입모양, 그리고 펠의 얼굴 조차 보이지 않게 몸을 돌린다. 벽을 짚고 펠에게로 가까이 고개를 내리고는, 속삭임 불어넣는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어 설이." 두근. "그 연구실에 있던 사람, 모두 걔가 다 죽인거야. 너를 위해서." 심장이 요동쳤다. 그럴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구멍난 그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한다. 연구실 내의 모두가 절멸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감히 설이 너가 한 짓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런 너를 저가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펠에겐 이제 생명의 무게가 너무나도 다르게 와닿았기 때문에 설마 적이라 할지라도 살인은 중대한 문제로 다가왔다. 떨리는 손이 도원의 어깨를 짚는다. 아마 그 모습도 cctv에 비춰질까. 여지껏 그런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김 설이라는 아이에 대해 낯선 두려움이 일고 있었다. 그 탓인지, 그 구역의 모든 cctv가 노이즈를 내며 전파가 흐려진다. 이 또한 행운의 교묘한 농간이다.) 도원아. 이대로라면 너도 위험해. (알고 있어. 라고 답하는 낯은 불안함이 깃든 펠의 것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게 계획대로 가고 있었으니. "너가 날 지켜줄거라고 믿어. 너의 행운은 강력하니까." 마치 독에 마비된 사냥감 마냥 거부하지 조차 않는 펠의 볼을 도원이 살살 쓰다듬었다. "설이를 멀리해. 모두를 위해서. 그 애, 너를 끔찍하게 사랑하니까. 무슨 짓이든 저지를 아이야.")
(‘지금 이 순간도, 지켜보고, 듣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건방지긴.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그 화면을 내내 보고 있었다. 눈이 멀도록 이 영상을 돌려보았으므로, 다음에 일어날 일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cctv의 화면이 일그러지며, 당신이 사라지고, 마치 아무도 없었다는 듯, 텅 빈 정원이 화면에 떠오른다. 이런 오류가 있으면 저에게 보고가 애저녁에 왔어야 했으나, 다음 날에나 들어오다니, 이 또한 누군가의 농간이려나. 당신의 행운이든, 그 새끼의 조작이든 간에. 두어번의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면, 머리에 능소화를 꽂은 채 얼어붙은 당신이 보였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메마르고 만다.) 우리 형은 꽃이 더 잘 어울릴 줄 알았지. (그래서인가, 당신이 준 믿음이 시든 꽃마냥 하루만에 져버리네. 그는 정말로, 연락도 없는 당신을 찾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꼬박 하루를. 보고가 오래 걸리겠거니, 보기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잡혔거니, 다른 이를 도와주고 있겠거니. 당신을 위해 제가 만들어낸 변명과 이유들을 적어내린 제 속을 아주 까맣게 칠할 때까지. 제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고이게 만드려는 듯, 의자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너무너무 속이 상했다.) 언제는, 내가 행운을 가져다 줄거라고 믿는다면서. (형, 나는요, 정말 형의 약속을 믿고 싶었어요. 형의 착한 동생이자 강아지가 되어주고 싶었고, 누구도 섬기지 않는 형이 제 목줄만 놓지 않았다면, 전 그걸로 행복했을지도 모를텐데. 왜 자꾸 저를 개새끼로 만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는 항상 준비를 해왔다. 어쩌면, 당신이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가 알지도 모른다. 보고가 들어온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당신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으니. 사실 찾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행운이 모든 일을 100%로 만든다면, 계산이 더 쉬워지니까. 이상하게 cctv가 오작동하던지, 교묘하게 가려지던지, 그런 것들을 줄로 이으면 되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만, 당신의 변수는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고, 당신이 저주했을 제 변수는 모두 저를 배제했을 거라고 가정하면, 사실 더욱 쉬워지는 일이다. 고장난 듯 일렁이는 화면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 세상의 모든 카메라가 당신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되려나. 오토바이의 열쇠를 쥔 채, 당신에게 문자를 남긴다. 꺼져있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그도 계산을 잘 해야만했다. 그러고보니 당신에게 향하는 길은, 생각해보면, 늘 이랬던 것 같았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꼬박 하루동안 조용했던 문자창에 네 이름으로 알림이 뜨는데도 한참을 답장 할 생각 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고민으로 밤잠 이루지 못한 두 눈이 퀭하게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에 얼굴을 묻는다. 혼란스럽다. 지금 도원의 침대에 걸터 앉은 제 자신도, 이 곳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며 네게는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건에 대하여. 분명 도원에게 제게서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했으나 그는 둘이 함께 있어야 본인이 안전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본인의 침대를 양보했다. 웃기게도 제 귀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니 낯선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거고. 김 설, 너를 분명 사랑하는데. 자꾸만 두려움이 일었다. 도원이의 말대로 너가 그간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면, 더 이상 저가 알던 너의 그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다. 만약 저가 도원을 멀리하게 되면 또 마음씨 착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단지 제 얘기를 들어주고, 제게 접근했다는 작은 명목만으로도.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제 곁의 도원이 계속해서 핸드폰을 끄고 있게 만들었다. 잠시 먹을걸 사러 나간 틈을 타 정신을 차린 지금에서야 전원을 켠 것이다.) ... (너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분명 이곳에 오기까지 능력을 과다로 쓰고 있었는데. 가이딩 수치가 부족한 탓에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꽈악 다잡는다. 너가 이곳에 와서 도원과 마주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보듯 뻔했고, 저는 그런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잠옷으로 잠시 빌려입은 웃옷을 벗어내고 제 옷가지를 집어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자를 친다.)
(힐끔 문자를 확인한다. 저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날 어디까지 바보로 만들 셈인지. 그것도 그 새끼 집에서. 애초에 그럴거면, 진작 집으로 돌아왔어야지. 그대로 밤을 보낼 것이 아니라. 아파트 앞에서 오토바이에 기댄 채 가만히 당신이 있을 창문을 올려다본다. 과연 엘리베이터가 움직일까, 그 작은 의문조차 거슬려서 헬멧을 벗어 쥔 가죽장갑이 아드득, 거리는 소릴 내며 힘이 들어간다. 당신이 정말로 날 피하기 위해 이 모든 행운과 불운을 끌어왔다면, 우연이라는 핑계로 운명처럼 저를 발견하겠지. 창문을 향해 입술을 벙긋벙긋 움직인다.) ‘이제 집에 가요.’
... (혹시나 해서 살펴본 창 밖에는 틀림 없이 너가 서 있었다. 솜털이 곤두서고, 등골이 서늘했다. 이상하지.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이. 분명하게 노려보는 저 작은 눈에서도 펠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무언가를 읽어낼 수가 있었으니. 그럼에도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제 유일한 사랑으로부터 도망칠 용기조차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을 가리키고 문이 열린다. 거기서 걸어나온 펠은 너와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과 같았으나, 고민에 수척해진 낯빛은 평소의 그 윤기보다 덜했고 최대한으로 튀어오른다 한들 한참은 덜한 눈안의 별빛이 달랐다. 세워진 오토바이에 기댄 너에게로 천천히 다가선다. 씁쓰름한 미소.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 ...오지 말지. 내가 간다고 했잖아.
(지금부터는, 저도 테스트해보지 않은 영역이라. 엘레베이터가 한층 한층 땅과 가까워질 수록, 제 시선도 서서히 내려왔다. 어느새 헬멧을 내려놓은 채 제 장갑을 만지작 거리며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더, 아니지, 당신은 이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잖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이랑 멀잖아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미소조차 짓지 못한 건조한 애교를 건넨다. 굽이 있는 신발 탓인지 무엇인지 당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그늘져, 안광조차 없다. 당신도, 그 새끼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당신이 피곤해보여서 다행이었다. 늘 제 불행과 당신의 행운 중 어느 게 더 확률이 높을지 궁금했어. 충분히 다가온 당신의 허리를 감아쥐며 한 손으로는 당신의 코와 입을 틀어막는다. 여직 만지작 거리던 장갑에서 가루가 묻어나왔다. 한 쪽은 고통만이, 다른 쪽은 안식만이 당신을 기다릴 때, 당신의 행운은 어느 쪽을 택할까.) ...나는 형이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요.
읍, 읍! 끄흑-...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몸부림친다. 너의 가슴팍과 어깨를 손으로 밀쳐내보지만 허리의 감긴 팔이 단단하게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 너가 라이딩 장갑을 잘 끼지 않던 걸 기억해냈어야 했는데. 그만 너가 반가와서 간과라도 한 걸까. 헛숨을 잔뜩 들이킬 때마다 머리가 새하얗게 바래졌다. 옷을 잡아쥐던 손아귀의 힘도 약하게 미끄러졌고, 두 눈이 풀려서 위로 향하더니 이내 감겨버린다. 축 늘어진 몸을 네 품에 기대어 맡기면 꿈결 같이 편안했다. 벌써 나의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행운은 항상 그 주인이 모르도록 여러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이 경우엔 사랑하는 김 설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행운의 걱정어린 애정으로. 손에 비닐봉지를 든 이도원이 저 멀리서 걸어오다가 우리 둘을 발견한다. 우뚝 멈춰선 그의 얼굴엔 많은 생각이 스쳐가는듯 보였으나, 뛰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만의 생각이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냥, 그렇게 믿어야했다. 그래야 당신이 제 품으로 돌아올테니. 반대편의 장갑을 입으로 물어 벗고는 당신의 얼굴을 살살 정리 해준다. 거봐, 집 나가니까 고생만 하잖아요. 부드럽게 어르던 당신의 이마 위로 입술을 부비곤, 헬멧을 조심스럽게 씌워준다. 그는, 당연하게도 이도원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의 얼굴을 가린 것이기도 했다. 비릿한 웃음이 가득했다. '핸드폰.' 그렇게 입을 방긋 거린다. 당신이 소문을 그렇게 잘 낸다며. 무능한 제가 아는 것은 사실 뿐이라서. 당장은 입을 다문 핸드폰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의 질타가 있을까. 그것은, 전부, 그의 업보일 뿐이었으니, 호의와 타인을 거름 삼아 피운 꽃의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편, 집으로 돌아오니, 람다가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람다는, 막내 소대원이자 유망한 가이드였다. 저로서는 그의 본명이 지율이라는 것도 한참 생각해야했지만 람다는 나름 저를 소중하게 여겨주었나보다. 허나, 지금 저는 제 품에서 당신이 얌전하게 눈을 감았음에도, 람다에게 팔을 내밀고 있는 게 불편할 정도로... 당신 밖에 없었으니까.) 갈 때.. 키링 가지고 가세요. 미안해요. 나는 친구 사귈 줄을 잘 몰라서. 내일은 쉬어도 좋아요. (오랜 가이딩 끝에 몸을 일으키는 람다에게 하는 소리라곤, 메마른 명령이었다. 람다도 고갤 순순히 끄덕거렸다. 그런 명령을 던지는 정보장의 눈이 단 한번도 그를 담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드디어 우리의 집에 단 둘이 남으면. 당신을 물수건으로 부드러이 닦아주고, 옷을 가라입히고, 마지막으로 손목과 발목에 수갑과 족갑을 채웠다. 초록 불이 깜빡깜빡거리는 것이 공명하듯 제 목에 걸린 것과 같은 박자로. 오랜만에 당신과 게임을 할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 곰인형을 안은 어린 아이마냥, 당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당신의 수갑을 매만졌다. 나는.. 정말, 어떡하면 좋아. 여지껏 기다렸던 것 중에 가장 달콤하게 느껴질 지경이니. 상황이고 자시고, 그냥 영영 당신을 재워두고 싶으니, 저는, 정말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명확한 건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 뿐이었다.)
(기분 좋은 꿈을 꿨던 것 같다. 너도 거기 있었어. 담담하게 올려다보는 너의 두 볼 위로 홍조가 일던 그 수줍은 날들 중 하나였다. 사랑해. 두 말이 오가고 너는 나를 품에 안아주었지. 꿈결에도 베시시 입가에 미소가 일었다. 코 끝에 걸린 너의 체향이나 익숙한 온도의 따스함 때문이었다.) 설아... (웅얼이는 잠꼬대와 함께 몸을 바르작거리자 잘그락거리는 쇳소리가 난다. 갑자기 온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바닷물이 와르르 차올라 목을 향해 차오른다. 잘그락. 퍼득 몸을 떨며 끙, 참던 숨을 몰아내쉰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여즉 미소짓던 너와 나의 주변으로 사람이 하나 둘 씩 불이 꺼지듯 사라져갔다. 결국 헐떡이던 숨을 탁 터뜨리며 눈을 뜬다. 이제서야 진정한 악몽의 시작인줄도 모르고. 고개를 돌려 뒤에서 저를 안은 너를 한번 바라보고, 양 손을 들어 두터운 수갑을 눈에 담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은 천천히 절망에 빠져가고 있었다.) ...
(희뿌연 새벽의 어스름이 뉘엿뉘엿 당신의 방으로 스며들어 당신의 몸을 비추었다. 저의 것과 달리 꽃덩굴이 음각으로 새겨진 그것들은, 어여쁜 장식품 같기도 했다. 이 방을 택한 것은 단지, 당신의 방에 화장실이 딸려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것들이 당신을 묶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결국 다 의미 없는 것들이다. 이를 증명하듯, 침대와 당신의 한 쪽 발목을 겨우 붙든 사슬은 가늘기 그지 없었다. 그저 당신의 반경을 한계 짓기 위한 같잖은 술수일 뿐.) 잘 잤나봐요. 다행이다. (당신의 잠꼬대에 다정한 어조로 답을 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제 입술을 붙혀 오는 꼴이 꿈과 다르지 않았다. 굳이 고갤 돌려 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긴 나도 거울을 통해서보다는 직접 눈에 담는 것이 취향이긴 했다. 그는 밤을 꼴딱 새우는 내내 당신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침대 건너편에 걸린 전신 거울을 통해, 당신의 설렘, 애정, 불안, 공포, 끝끝내 절망까지, 꼭꼭 씹어 음미라도 하듯 하나도 빠짐없이. 이렇게 당신이 저를 기다리게 한 시간은, 결국 3일이나 되었다. 수면과 식사를 찾는 본능 앞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데, 제 품에 당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앞에서는 깨끗한 당신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면서도 당신의 뒤에서 따스한 어조가 이어졌다.) 내가 분명, 여기 입술 자국 지워지면, 안 풀어주겠다고 했는데. 기억하세요? (저로 부터 도망치느라 바빴던 당신이 기억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망가진 cctv와 저를 막는 황당한 일들의 연속에서 당신의 절박함만 읽었다. 그 절박함이 저로 부터 도망치기 위함이라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허나 이 또한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당신이 기억해야할 것은 오직 단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그것을 되새기듯 다소 거칠게 당신 잠옷의 한쪽 어깨를 끌러내려 입술을 묻는다. 거울을 통해 잔잔하게 당신의 낯을 살피는 검은 눈동자 속에서, 광기, 비통, 절망, 갖은 부정들이 소용돌이 치다가 흘러넘칠 것 같았다. 얼굴을 부비듯 입술을 스치던 그가 기어코 입을 한가득 벌려 당신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도원의 손이 닿았던 곳을 제 잇자국으로 덮을 것 처럼.) 죽을 때까지 제 곁에 있어주겠다는 약속은요. 그것도 기억하세요? (피 섞인 은빛 실이 주욱 늘어났다. 당신을 품에 다시 고쳐 안으면, 제 목에 걸린 것또한 절그럭거렸다. 당신이 그 맹세만 기억하면 되었다. 영민한 당신이니, 멋대로 수족갑을 풀어버리면 일어날 일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
아윽! 으... 아, 파... (쓰리고 아린 통증 때문에 눈 앞이 번쩍인다. 욱씬, 보지 않아도 어깨엔 붉은 잇자국이 새겨져 있겠지. 몸을 잘게 떨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사슬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그래, 아직도 꿈인거야. 너가 이런 짓을 할 애가 아닌데. 슬프게 쳐진 눈이 거울에 비춘 네게로 향한다. 꿈이라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그 아이였으니. 와중에 온전히 안광을 잃고 돌아버린 눈빛은 둘째 치고, 며칠은 물 한모금 안 마신 것 같이 수척하고 바래진 네 모습에 더욱 슬퍼졌다. 손을 올려 한쪽 볼을 살살 감싸며 너를 설득한다.) 설아. 이러지 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응? 일단 이거 좀... (너를 담은 눈에 금빛이 마구 튀기 시작한다. 얇은 수갑은 아름다운 그 마감과 어울리지 않게 허술한 소음을 내며 곧 풀릴 것 처럼 달그락거렸다.)
(당신의 손을 피하듯 고개를 뒤로 빼내고 당신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당신에게 제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고 싶지 않은 탓이 컸다. 당신의 손 끝으로 전해지듯, 제 얼굴은 가칫하니 엉망이 되었을 게 뻔했고, 그런 미운 모습을 연인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거울 너머로 다시 돌아온 샛별과도 같은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 어디에도 제게 맹세했던 것이, 누군가가 잘라냈던 수지와 같이 흔적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빠져나간 판도라의 상자처럼 단 하나의 감정만이 남았다. 그것의 이름은 비애였다.) 정해진 방법으로 풀지 않으면 제가 죽고 말거에요. (울컥거리던 목소리가 평소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외려 지나치게 차분했다. 쉬잇, 어린 아이를 달래듯 바람소릴 흘렸다. 어느새 어깨 위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도, 당신의 허리를 감싸던 손도 앞으로 뻗어와 달그락거리는 수갑을 감싸듯이 붙들었다. 우리의 약속은 그런 것이었고, 이것은 그런 장치였다. 당신은 손해볼 것이 하나 없었고 제게 잃을 것은 고작 목숨뿐인,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자신의 사랑이자 집착이며 당신을 붙들기 위해 여지껏 고민해왔던 물음의 대답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행운으로 이 수갑을 풀어버린다면 제 목 위의 것이 깔끔하게 잘려나갈 것이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처럼. 당신의 소지처럼. 우리의 인연처럼.) 떠나실거면, 차라리 형의 손으로 절 죽이고 가요.
... (한 몸의 맥박처럼 함께 점멸하는, 거울 너머의 목줄을 보며 말문이 막히고 만다. 너의 손 안에 붙들린 손목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너에게 모든 걸 걸어보라고 말해주었건 그 날이 떠올랐다. 너가 너의 목숨을 이토록 쉽게 여기게 된 건 그때부터였을까.) 넌, 넌 이런 애가 아니었잖아... (모든 것이 제 탓이었다. 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가 이런 괴물이 될 일도 없었을텐데. 다른 이들이 네 손에 목숨을 잃을 일도 없었을텐데. 너의 사랑에 내가 빠져버렸기 때문에. 파도는 치고 또 치더니 기어코 닥치는대로 삼켜버렸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 너를 향한 안타까움. 모든 것이 섞여 노란 빛 안에서 일렁였다.) 내가 널 떠날까봐 그러는거야? 그치만 설아. 난 여기에만 영원히 있을 순 없어.
제가 했던 말들이, 전부 농담같았나요? (잠시 어깨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어, 당신의 손목과 수갑 사이에 제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그 거친 손길에, 수지 끝, 속살이 보이도록 뜯었던 상처가 또 터져 피가 얼룩처럼 남았지만, 개의치 않는 듯 그 안을 문질러보았다. 안의 이음새며 벨벳이 망가지지 않음을 확인하면, 그제서야 느릿하게 손을 거둬 당신의 허리를 꼭 감아쥐었다. 내밀었던 고개는 다시 당신의 어깨 너머로 숨어버린 모양새였다. 당신의 멀쩡한 어깨 위에 제 이마를 올려둔 채, 무언가를 삭히듯 등어리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하악을 사리물은, 억눌린 숨소리가 이어지다가.) 이미 날 떠났었잖아요. 내 세상에서 사라지기 위해 온 힘으로 발악하는 형을 대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요? 나는 죽을 각오를 해야지만 붙들어놓을 수 있는데 그 새끼의 속삭임 하나에 사라져버린 형을 보면서 어떻게, 제가 등신처럼 웃을까요? 많은 거 안 바랐잖아요. 제가 뭐, 형더러 수억원 어치의 돈이나 누굴 죽여달라거나, 말도 안되는 그런 거 요청한 적 없잖아요. 그냥, 그냥.., 계속 제 곁에 머물러달라고만 했는데, 저를 떠나버린 건 형이었잖아요. 나는 이제 죽음이 와도 형을 보내줄 수 없는데, 사랑한다고, 내가 욕심난다고 저를 안심시켜놓고, 절 버리고 떠난 건. ...형이었잖아요. (광인의 몽중몽설마냥 맥락도 논리도 없었다. 분명 차분하게 시작했던 물음은 이윽고 악에 받친 듯 일렁였고, 종국에는 나직한 선고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는, 떠야하는 태양을 삼킨 채 토해내지 않는 밤바다마냥 어둡기만 했다. 어쨌거나 태양은 바다의 배를 가르고 떠야하는데, 그 발악의 여파인듯 눈사위가 온통 핏빛이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태양이 뜨기를 기다렸으나, 차가운 밤만이 저를 기다렸다. 와중에 당신이 아플까 뻐근하리만치 매달렸던 옷자락을 놓았다가, 넓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당신의 허리를 다시 감싸안았다. 애교를 부리듯 당신에게 메마른 볼을 부벼오며 고분고분하게.) 대체 왜 그랬어요? 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나요?
(억한 심정이 가득 담긴 너의 말을 가만히 듣고있으면 마치 울부짖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너는 혼자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아파했겠지. 피로 얼룩진 손목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묵묵히 닫혀있던 입술이 긴 침묵 뒤에 떨어진다.) 미안해. (울기 어린 목소리가 갈라졌다.)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너한테 믿음을 주고 깨뜨려버려서. 미안해.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보며 마저 고해했다.) 무서웠어. 도원이가 알려준 너의 모습도. 모두 나를 위해서 한거라고 해도... 그리고 도원이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들도 꼭 그렇게 될까봐. 무엇보다 내가 널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봐. (힘겹게 말을 마치고 고개 숙이자 앞머리가 얼굴을 어둡게 드리운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네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김 설을 사랑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설이는 달라. 이런 짓은... 하지 않아. (반쯤 몸을 돌려 네 어깨를 붙든다. 그렇게 마주하게 되면, 형편 없어진 네 모습이 제 가슴을 찢어놓아 결국엔 하얀 볼 위로 물줄기가 한방울 흐른다.) 이런 짓은 그만 둬. 없던 일로 하자. 다 잊어버릴게. 부탁이야.
(기어코 저의 태양이 제 배를 가르고 뛰쳐나가려하신다. 그런데. 그런데, 칼로 꼭 그 새끼의 이름을 써야했어? 그 새끼가 그렇게 소중해? 내게, 울면서 사과를 해야할 만큼? 비적비적 새어나가는 웃음 탓에 허옇게 뜬 입술이 흉했다. 뭐, 이제 됐어. 이미 이야기했듯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제가 해보니까, 한 사람을 싫어하는 행위는, 하루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더라.) 새삼... 궁금하네요. 제가 단 한 번이라도, 형의 사람을 해친 적이 있어요? 형을 다치게 한 연놈들 말고요... 형을 즐겁게 하고, 웃게 만든 사람들 말이에요. 이상하네.., 난 그 사람들에 대한 질투는 보여준 적이 없는데. 형이 내게 불평할 정도로... (당신의 턱 끝에 구순을 가져다 대어, 눈물을 머금으면, 버석거리던 것이 잠시 붉은기를 되찾았다. 제 몰골은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당신을 안기 위해 어거지로 씻으면서도, 시체와 같은 꼴을 보기 싫어서, 제 곁에 없는 당신을 확인하기가 싫어서, 거울을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당신의 눈물과 절망, 증오로 저를 치장하면 예뻐보이려나.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하는 제가 미쳤구나 싶었다. 그래서 뭐? 문드러진 마음이, 본래 당신을 변호하느라 스스로 검게 물들어가며 바쁘기 그지없던 그것이 그렇게 속삭였다. 아득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입 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당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제 어깨 위 두 손회목을 부드러이 감싸왔다.) 이런 짓이, 뭐길래요. 생각해보면, 평소랑 별로 다르지도 않잖아요. 형이, 제 목줄을 쥐고 있고, 저는, 형만을 눈에 담고..., 왜요, 이제 절 가지고 노는 것도 질려요? 그래서, 그래요?
도원이는 날 해친 적 없었잖아. (그런데도 너는, 서서히 그의 발길을 조여왔지. 살짝 좁혀진 미간이 네게로 향한다. 결백하기만 한 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 너의 행동은 꽤나 강압적이었다. 손목을 놓으라는 듯이 팔을 움직이자 수갑이며 너의 손은 더욱 강하게 저를 조여왔다. 너를 가지고 논 적이 없다며 부정하려던 것은 도로 침묵으로 바뀐다. 그야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비록 너와 사랑에 빠지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것을 떠올리면 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
저도 그 새끼 해친 적 없어요. (당신의 말이 너무 가혹하여 말을 자르듯, 비명을 질렀다. 당신의 손목을 움켜쥐던 손이 벌겋다못해 하애진다. 그의 살성에, 금새 멍처럼 부풀어오르겠지만, 까득 쇠 긁히는 소리에 그제서야 힘을 빼고 당신의 손목에 상처라도 난 건 아닌지 이리저리 살펴본다. 안도인지, 분노인지, 복잡하게 뒤엉킨 한숨과 함께 읊조린다.) 저는, 그 새끼가 형의 목소릴 들으면서 한 발 뺀 걸 알았을 때도... 제가 형을 떠난 동안 어떤 가이드랑 몸을 섞었고, 제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조롱했어도. 그 새끼가 형에게 손을 대기 전까진, 어떤 것도 안했다고요. 알아들어요? 왜 그 새끼 말만 들어요? 나는요? 하다못해 범죄자한테도 변명할 기회를 주는데, 왜. (끝끝내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두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을 붙든 채, 당신의 상처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당신이 제 품에 있어도 이렇게 참혹하고 끔찍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당신을 품에서 떼어낸다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놓지도 못했다. 차라리 엉엉 울기라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은데, 이래저래 살기 위해서, 쥐어짤라해도, 그럴 여력이 없었다. 이젠 정말 한계였다. 심력도, 체력도. 당신이 이렇게 나와버리니 단단했던 의지도, 햇빛에 녹아버린 양 사라졌다. 당신을 품에 안은 채 침대헤드에 기댄 몸의 힘을 풀었다. 전력이 내려간 것 마냥 피곤하기만 했다.) 저야말로 부탁이니까... 내가 형을 너무 사랑해서, 다 잊고, 다 용서할테니까, 제발.. 나 자고 일어날 때까지만, 제 곁에서 잘 생각해봐요. 제 노트북 협탁에 뒀으니까, 형이 직접 cctv를 다 확인하든, 제 파일을 전부 뒤져보든. 저 진짜로 한 한시간? 별로 안 잘거니까. 마지막 정이라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그래도 납득이 안가면, 그래도 내가 그렇게 끔찍해서 떠나야하면. ...그때 수갑을 풀고 떠나도, 늦지 않잖아요.
(처음 듣는 너의 처절한 외침에 움찔 놀라고 뒤늦게 벌건 손자국 위를 매만졌다. 아파. 그렇게 호소할 필요도 없이 조인 것을 다시 살피는 너를 보자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런 것도 사랑일까. 네 안에 아직 사랑이라고 부를만한게 남아있을까. 사실 이도원이 정신 조작 센티넬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보기 좋게 세뇌당해서는 너가 위태롭게 저를 붙든 이 순간까지도 이도원을 향한 연민과 걱정이 일었으니까. 다른 것이 필요했다. 다른 목소리. 혹은 계시가. 침대 곁 노트북에게로 시선 흐른다. 다시 네게로. 고민하는 동안 너는 눈가 검은 얼룩 짙게 드리운 채 눈꺼풀을 내리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너가 말하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속상함을 가득 담아 작은 한숨을 쉰다. 한 손으로 깊이 잠든 너의 볼을 감싸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누른다. 미안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용서를 빌고, 노트북으로 손을 뻗는다.) ...
(기절에 가까운 숙면이었다. 차라리, 고통에게서 저를 구원하고자하는 당신의 자비라고 믿고 싶어질 정도로. 자는 내내 당신의 옷자락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유일한 동앗줄이라도 된 양, 제 모든 악몽으로 부터 지켜줄 애착인형이라도 되는 양. 어느 누군가가 수면은 죽음의 예행연습이랬나. 당신이 저의 사랑을 의심할 거라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면서, 당신의 입맞춤은 알아, 앓는 소리를 멈췄다. 스륵, 마디마디가 불거지도록 쥐었던 손아귀에도 힘이 조금 풀렸다.) ...형, (잠결에 당신을 불렀다. 한편 노트북의 잠금은 당연하게도, 풀려있었다. 화면엔 갖은 cctv 영상들이 있었는데, 편집은 되어있지 않았지만, 마킹이 되어있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라면 필요한 부분만 보겠지만, 저는 당신이 그런 것에 능력을 쓰고 가이딩을 받는 것이 싫었다. 입을 함부로 놀린 이들이 횡령을 하는 모습. 입을 놀리기 전에 도원과 포옹 내지는 스킨십을 하고. 이런 저런 나쁜 소문들을 옮기던 도원이 당신과 제가 있던 날 밤, 이어폰을 꽂고 홀로 자위를 하고. 마침내 제가 불러내던 그날까지. 매일매일이 기록되어있지만, 당신이 찾던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허나 입구를 찾을 수 없다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당신의 능력도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검은 배경에 흰 글씨로 쓰여있는 단어는 단 두 개였다. for you.)
(나직이 이름 부르며 곁에 앉은 제 옷을 기어코 놓는 너를 가만 바라본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면, 영락 없이 귀엽고 어린 나의 연인일 뿐인데.) ... (검은 화면을 응시하다가 손가락이 이끄는대로 적어본다. 'Fel') ... (잠시 망설이다 약지를 툭 움직여 그 끝에 'l' 하나를 더 붙인다. '엔터'. 검은 창 위 'Fell' 끝에서 깜박이던 언더바가 사라지고, 이어 3D 마인드맵이 대신 화면 가득 나타난다. 얽히고 섥힌 동영상 파일과 누군가의 개인정보들이 두 눈에 비춰진다.) ...설아. (신음 같이 네 이름이 입술 위로 흩어진다. 정말 모든 걸 이곳에 담아왔구나. 따로 모아진 저의 신상 파일을 열어본다. 방대한 양의 정보가 보기 좋게 묶여 있는 것은, 누가 보면 가히 예술의 형태에 가까웠고 거기서 느껴지는건 두려움이 아닌, 저를 향한 애정이었다. 그냥 물어보지 그랬어. 그럼 너한테는 그냥 다 알려줬을텐데. 제 못난 본명이며, 출생지. 그리고 정부 산하 센터에서 기록된 모든 성장 일지와 생기부까지 찬찬히 훑어본다. 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기억들이 너의 머리에 묻혀있었다. 그곳에서 나와 영상 파일 중 제일 최근의 파일부터 살펴본다. 너를 피해 저가 걸었던 거리들이 담긴 CCTV 영상. 이도원의 신상 정보, 그리고 그와 저가 가졌던 만남을 기록한 모든 영상과 타인의 진술들. 과거 기록을 긁어오지 않았다고 한 적은 없으니, 엄밀히 따지면 너가 저를 별거 기간 동안 감시하지 않았다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념에 빠져있을 떄, 영상 속 이도원이 너의 사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정보장님, 그게 무슨 말인지." 여기까지는 펠도 기억하는 익숙한 도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재미있네요. 그러는 당신도 펠을 가지지 못하잖아." 처음 들어보는 그의 시니컬한 어조. 그의 나른한 얼굴은 마치 가면을 벗은 것 같이 홀가분해보였다. "저도 소대장님 기록을 좀 봤거든요. 누구 덕에 진급하시기 전까진 같은 계급이지 않았습니까? (조소). 나이에 비해서 너무 능숙하지 않았어요? 펠이 여태 얼마나 많은 가이드 들이랑 재미를 봤는지 펠이 당신 같은 애송이를 좋아하는게 이상할 따름이죠. 소대장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시나요. 뭐, 어쩌겠습니까. 센티넬은 가이딩이 필요한데요. 그리고 펠은 앞으로도 가이딩이 필요할 겁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을거라고요." 그만. 그만. 영상을 멈춰버린다. 도원은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저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무표정한 표정 너머너의 상처를 읽어버렸으니까. 그제서야 마음 속에 깊이 박힌 거울파편이 녹아내리듯, 도원이 제 안에 심어놓은 씨앗이 썩어버린다. 정신이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양 손에 묶인 결박은 함께 사라지진 않았지만. 이것은 저가 불러온 결과. 달게 받아야 하는 벌이자, 저를 향한 너의 애절한 사랑이었다.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더 이상의 파일을 열어볼 필요는 없어보였다. 수척한 얼굴로 잠든 너를 한참 바라본다. 너가 제 옷을 놓아서 새삼 다행이었다. 최대한 쇳소리 없이 움직여 수갑에 이어진 줄을 한번 잡아당긴다. 철그럭, 가장 약한 링크가 운 좋게 끊어진다. 그에 이어 족갑에 이어진 줄까지도. 너가 꺠지 않도록 천천히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디고, 방 밖으로 나선다.)
(뻐근한 눈을 두어번 깜빡여본다. 원래도 잠투정이 심했는데, 며칠만에 잠에 들었다고, 평생의 습관이 바뀔 일이 없다. 그건, 잠결에 당신을 찾는 허우적거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옆을 향해 손짓을 하다가, 차게 식은 시트만 잡히면, 제 머리를 쥐며 입안을 짓씹었다. 이미 걸레짝처럼 너덜한 살이 그저 질긴 고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국, 제 목숨으로도 당신을 잡을 수 없었나봐. 결국, 저를 수면으로 이끈 건, 마지막의 고통을 덜어주는 당신의 자비였나봐. 허탈함에 실실 쪼갰다가, 한숨을 뱉었다. 어리광도, 붙잡을 이도 없으니, 옛날처럼, 입을 굳게 잠군 채 비틀비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당연히 제 시체는 치웠나. 아니면, 이곳이 곧 지옥이려나. 그럼 그 새끼 곁에 갔으려나 형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제 목에 걸린 것이 짤그락거렸다.) ... (방문이 절반 정도 열려있는 것을 보며,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다. 저거 잡히려나. 잡히면 지옥이나, 뭐 내면세계 그런거고, 안 잡히면, 그런대로 형을 보러 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에 슬며서 문을 열면, 바지런히 움직이는 당신이 보였다. ...좋아, 내면세계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겠다. 지옥인데 제가 좋아하는 걸 보여줄리가 없잖아. 느릿하게 걸어가 당신에게 푹, 기대어왔다. 당신의 어깨 위에 제 팔을 두른 채. 입 안의 아릿한 고통이나, 제 몸의 근육통을 생각하면, 비록 고통을 느낄 정도로 몸이 망가졌어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하는데도.) 이게, 형 꿈 안이면 좋겠어요. 적어도 그러면, 형이 내 꿈 꾸고 있단 말이잖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사골국을 휘휘 젓다가 뒤에서 덮쳐오는 무게감에 몸을 일순간 굳힌다. 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너는 여태까지 저가 알던 너와는 사뭇 달랐으니. 혹시나 침대 밖을 벗어났다며 목이라도 조를까 조마조마 하던 걱정은 너의 부비적거림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흐흐 작게 웃음 흘리며 잘 풀은 계란 물 후라이팬 위로 붓는다.) 내 꿈 속에 설이 너가 자주 나오긴 해.
내가 죽고나서도, 내 꿈을 꿔요? 그건 생각 못했는데. (다른 새끼 꿈 꿀 줄 알았지. 하고 어차피 실제 당신은 모를거라며 내숭 따위 집어치운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어깨에 올려둔 팔을 내리고, 당신의 어깨를 감싼 두 손으로 당신의 어깨, 견갑, 그리고 허리를 따라 느릿하게 손을 내리며 당신의 상체를 어루만졌다. 당신의 허리를 품에 당겨오기 위해 손바닥으로 양 옆구리를 쓸며 고개를 당신 옆으로 숙이면 뒤늦게 비릿한 혈향이 코를 스쳤다. 그제서야 당신의 어깨에 조금 배어나온 핏물을 보고서는 이런 것도 반영한다고, 그런 생각에 점차 이상함을 깨닫는 와중이었다. 정보 수집 중에 수많은 임사체험, 빙의, 유체이탈, 별의별 괴담을 읽어본 적은 있다만 이런 건 읽은 적이 없다. 서서히 코 끝에 섞여들어오는 당신과 음식의 향이며, 손 끝에 닿는 당신의 감촉과 온기가 하나같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결국 알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은 게 나았을지도 몰라. 부정하듯 허리춤을 쓸던 손이 당신의 한 쪽 팔꿈치를 감싸듯 붙들고, 다른 손이 당신의 반대쪽 팔을 쓰다듬으며 흘러내려가 손 끝에 닿은 수갑을 빙글 돌리듯 매만진다.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고 제게 일깨우는 목줄마냥 끊어진 사슬이 딸려왔다. 깨어나보니, 차라리 지옥이 나았을 지경으로 나락이었더라. 도저히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도망갈거면 이젠 사랑하지도 않는 저를 죽이고 가라니까, 구속은 끊었는데 집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당신을. 하기사 당신의 집이긴 하니까, 이따가 그 새끼가 올 예정인가. 그 cctv만으로 당신과 그 새끼와의 견고한 ’우정‘에 금이 갈 거라 생각치 못했다. 단지 그 새끼도 나쁜 새끼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아둔한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태양과도 같이 공평한, 당신의 자비 뿐이었다.) 아니면, 수갑을 끊을 정도로 제가 끔찍했는데, 불쌍해서 죽이진 못했어요?
너가 죽다니... 읏. (그리고 나한테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어디있다고. 상체를 느릿하게 어루는 손길에 흠칫흠칫 작게 신음한다. 이렇게 구속된 순간에서도 네가 만지는 손길대로 솔직하게 반응하는게 야속했다. 의아할 정도로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너가 좋았는데.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더니 이내 현실을 깨닫기라도 한건지 사나운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오는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달라지는건 없었다. 달칵, 태연하게 불을 끄고 냄비를 식탁 위로 옮긴다.) 난 어차피 이 집에서 안 나갈건데, 밥은 먹어야지. 너 지금 얼굴 빛이 말이 아닌걸. (배고프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밥솥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이 한가득이었다.)
(제게 반응하는 모습이나, 그 속도나 당신이 맞긴 한데. 당신이 이리저리 움직이면 한걸음 물러서서 당신이 하는 것을 쫓는 조용한 시선이 끈질겼다. 밥에 약이라도 탔나? 이렇게 안심시키고 또 이번엔 무얼하려고? 당신이 부드러워지면 부드러워질수록, 상처받은 마음에 외려 경계심이 돋는 듯 당신에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고갤 돌려 외면하지도 못했다.) ...밥보단 설명이 더 필요한데요. 무슨 상황이에요, 이게? (어차피 밥을 먹을 상황도 못 됐다. 지금 먹어봤자 피맛밖에 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보다 당신이 해준 음식을 먹으면 그야 행복하기야 하겠지만, 안심되는 건 아니라서.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잔인하게 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온화하고 따스하게, 그렇게 저를 부드러이 달래듯 웃는 당신을 어찌 생각해야할련지. 제가 그토록 바랐던 태양이 세상에 다시 돌아왔음에도, 저건 분명 태양이 아닐거라며, 분명 저를 말려 죽일 속셈일거라며, 얼어붙은 채 두려워하는 꼴이었다.)
파일은 다 확인했어. 도원이가 정말로 어떤 애인지도 알았고. 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수저를 달그락 놓아두고 자리에 앉아 밥을 두 그릇 펐다. 평소 그랬듯 가장 많이 담긴 것을 네 자리에 놓아준다.) 너가 어떤 사람들을 해쳤는지도. ...사실 난 여전히 너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갔다는게 속상해. 날 위해 한 일인데. 이러면 너가 배신감이 들까? (씁쓸한 웃음소리 흐른다.) 혼자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설아. 난 그래도 너를 사랑하나봐. 너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내가 이곳에 영원히 있어야만 너가 행복해진다면, 그렇게 할게.
(스스로를 방어하듯 팔짱을 끼고, 꺼슬하던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당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비척거리며 구급상자를 찾아와 당신의 곁으로 돌아와, 식탁 위에 올려둔다. 의자를 빙글 돌려, 당신이 저를 마주 보게 한 뒤, 당신의 다리 사이에 제 무릎을 끼우는 것도, 여전히 안광 하나 없이 침잠한 눈동자도 당신이 제 곁에 남아있으리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앞치마 끈을 내리고 당신의 옷을 들추는 손짓은 예전과 같이 다정했다.) ...날 위해서 한 짓이라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고. 배신감보다는.., 형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만 드네요. 저도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에요. 형은, 다르다고 했지만, 형이 사랑해왔던 저는 원래 이런 새끼에요. (당신의 턱 끝을 살살 쓸며 옆으로 제낀 채, 제가 남긴 상흔을 살펴본다. 흉이라도 남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텐데. 제 손을 알코올 솜으로 닦고는, 당신의 상처를 조심히 처치하기 시작한다. 소독약을 뿌리고, 연고를 손가락에 얹어 당신의 어깨에 미끄러트리며, 고민한다. 제 목표는 사랑하는 당신의 행복이었을 뿐이고, 단지, 그 길에 제가 방해가 된다면 저 역시 제거되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 제 존재가, 당신의 행복에 충분조건인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제 사랑은, 질리도록 이야기 했으니까 넘어가고. 저는 형이 여기에 남아있길 바란 적 없어요. 형이 늘 제 곁에 있으면서, 설령 떠나더라도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긴 한데, 형 말대로 하면 저야 의심할 여지 없이 행복하겠죠. 그럼, 형의 행복은 어떡해요? 형은 이렇게 살 수 없다면서요. (어깨 위에 넓적한 밴드로 상처를 덮고는 다시 당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다. 일련의 과정 내내 수지에서 섬세함과 애정이 묻어났지만, 남이 보기엔 서늘할 뿐인 무표정이 어그러지는 일은 없었다. 당신의 심장에 박힌 거울이 녹아 내리며, 제가 쥐고있던 거울 파편들 마저 녹아버린 모양이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맞지도 않는 조각들을 제 피를 접착제 삼아 붙혀왔던 것들이.)
...이런 너라도, 너니까. 난 이전과 다름 없이 널 사랑할거야. (네가 만든 상처 위로 연고를 덧바를적에, 얌전히 네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작게 말했다. 이미 체념한 듯 반쯤 감긴 눈은 운명을, 너를 받아들인 모양이다. 내가 너에게 남긴 상처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는 이 어깨 따위보다 더욱 큰 상흔일테니까. 얼음장 같이 차갑기 그지없는 낯으로 손을 올린다. 보기와는 다른 따스한 볼을 매만지면, 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아는 그 아이다.) 너가 그랬었지. 죽기 전까지 너가 날 온전히 믿는 날은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그렇기에 너는 내 안에 뿌리를 박아버리기로 결심했었다. 나는 그에 기꺼이 가슴을 열고 자리를 내어주었고. 둥글게 휘는 눈매가 환희와 고통을 함께 내비쳤다. 다만 달라진게 있다면, 눈안의 노란 빛이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 내 대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설아. 난 안 도망칠거야. (천천히, 조심스럽게 아픈 팔로 너를 당겨와 품에 안았다.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게 설령 내 불행이라 할지라도. 나의 구속이 너를 편안하게 한다면 기꺼이 네게 두 손을 바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저와 나로 인해 다치는 이도 더 이상 없을거니까.)
(잠을 조금 자서 그런건지, 당신을 곁에 두어서 그런건지, 조금은 나아진 질감이 당신에게 기대어온다. 적어도 어제처럼 펄펄 들끓거나, 시체처럼 차갑지는 않았으니, 훨씬 나아진 것이다.) 이미 믿어버렸어요. 내가 형을... 믿나봐요. ...그러면 난 이제 뭐로 형을 붙잡아야해요? (당신의 심장을 후벼파며 제 안온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서 향기로운 꽃과 열매를 만들며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은 엉뚱한 사람이 와서는 이는 먹으면 안되는 것이라며, 금지된 것이 되어버렸다. 제 기다림은 썩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흉해졌고, 다른 이의 기다림은 당신의 머리칼 사이에서 어여쁘게도 피었다.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당신의 멀쩡한 어깨 위에 어정쩡하게 제 고개를 올린 채, 마주 안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저는 당신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의 행복조차 찾아줄 수 없는데. 당신은 저를 하나도 모를 적에도 이렇게 깊숙히 파고 들어와 제 상흔을 어루만져주는 건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얼음이 녹는 양 조용하게 흐르는 눈물이 당신을 적셨다. 제가 우는지도 모르는 낯으로 계속, 계속. 당신의 수족갑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토록 간단한 일이었다. 그날의 말다툼도, 그날의 오해도, 오늘의 집착도. 그냥, 마주 안아주길 바라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쇳덩이가 무거운 소릴 내며 떨어지고서야, 달달 떨리는 손이 당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속삭였다.) 왜, 자꾸 헷갈리게 해요? 왜 내가 행복하면, 형이 그렇지 않아요? 왜, 내가 보내줄 땐 날 붙잡아 놓고... 왜 이제 와서, 진짜 모르겠어요. 나, 정말 형이 보고 싶었는데...
미안해. (네게는 언제나 할 말이라곤 그것 뿐이었다. 그 한마디로도 부족한지, 계속해서 너의 등을 쓸어주며 그 말을 되내였다. 수갑이 제 발치로 떨어져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건 저에게조차도 그저 상징이었을 뿐이니까. 불쌍한 아이. 해바라기를 닮은, 사랑하는 나의 연인아.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비가 내려야 널 행복하게 할 수 있는걸까. 너를 사랑하기에 죄가 생기고, 그 죄를 갚기 위해 더 없이 사랑하길 반복했다. 우리 둘은 이중행성과도 같이 거스를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맴돌고 있었다.) 앞으론 널 혼자 두고 가지 않을게. 널 불안하게 하지도 않을거고. 나... 계속 겁을 먹나봐. 널 잃을까봐도 무섭고. 너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무섭고. 무서웠어. (어깨 위가 축축했다. 등을 여즉 토닥이는 제 목소리마저도 그것에 스며들었는지 눅눅했다. 그러나 눈물은 떨구지 않았다. 그건 우는 동생을 안은 형으로서 안될 말이니까.) ...흐흐, 있지. 살아보니 행운이란건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벗어나더라. 유일하게 잡힐 때는, 반대로 행운이 날 붙잡으려 할 때였어. (그리고 너는 나의 행운이지. 겹쳐진 품을 떼고 너의 얼룩진 볼을 엄지로 닦아주었다. 다시 마주한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샛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너와 처음 입맞췄던 그 날 만큼.)
이번엔, 형이 진짜 나빴어요. (직전의 당신의 고백과 달리, 이번만큼은 오롯한 당신의 진심인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갈 곳을 잃었던 궤도가 원상태로 돌아오듯, 주먹 쥔 두 손에 당신 허리춤의 옷자락이 한움큼이었다. 달달 떨리던 손의 진동이 잦아든 만큼이나 눈물방울이 굵어졌다. 17살, 당신보다 고작 2살밖에 어리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이토록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짧은 삶 내내 섭리에게 제 소중한 이들을 뺏기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는데에 급급했던 터라, 한낱 사람 한 명에게 당신을 보내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해가 떠오르고, 비가 내리려면 바다가 그들을 믿고 보내줘야하는데, 제게 그런 너른 마음은 없었다. 당신을 담느라 벅차, 넘칠까봐 늘 두려워하는 것이 저인 것을. 단지 그렇게 당신으로 가득찬 심장을 안고 있노라면, 그렇게 제 세상으로 돌아와 저를 꽃피우는 당신을 보며, 두려울 것이 하나 없었을 뿐.) ...잘못했어요. 그런 짓 하기 전에, 허락맡을 테니까,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주면 안돼요? 죽지도 말고.. 떠나지도 말고.. (찰나 멀어진 당신의 온기에 몸을 흠칫 떨고, 당신이 제 눈물을 닦아주면 떠듬떠듬 이어지던 단어들을 뱉던 상처투성이 구순을 합, 다물었다. 당신이 닦아준 것이 무색하리만치 잠시 멈췄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잔뜩 젖은 안경에, 시야를 가득 가린 물기에, 당신의 얼굴을 살필 여력도 없이 당신의 품을 파고든다.) ...그치만 형은, 행운이 아니잖아요. 형은. 그냥 내가 사랑하는 형인데..
나도 너무 늦게 깨달은거야. 너도 그냥 내가 사랑하는 동생인건데. 주사위를 굴리던 나쁜 습관으로 너를 굴려보고 있었나봐. 나도 모르게... (다시 와락 품을 파고드는 너는 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한들 여전히 제겐 어리광이 가득한 동생이었다. 웃으며 등을 토닥이길 두어번, 양 어깨를 잡고 살살 몸을 떼어내어 얼굴에 겨우 걸친 안경을 조심스레 벗긴다. 달그락, 부드러운 잠옷의 옷감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렌즈를 깨끗이 닦아냈다.)
저는, 형이 그렇게 저를 잃어버릴까봐 겁이 나요. (이전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게 당신과 멀어진다. 여전히 초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습관이라 당신의 옷자락에 손 끝이 머물렀다. 묵묵히 닦이는 저의 회한을 내려다본다. 그것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당신처럼. 내가 당신을 보내주면, 당신은 강이 되어 제 죄악을 씻어줄테야? 제 배를 직접 가르고 기다리면, 매일매일 돌아와 그 속에 몸을 뉘어줄테야? 나,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예쁨도 좋지만은, 이젠 애정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자꾸만 어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굴리다가, 떨어뜨려도 다시 주워줄 건가요?
당연하지. 그리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굴리지 않을거야. (말끔해진 안경을 네 얼굴에 다시 씌워준다. 일종의 면죄부와도 같이, 이제는 너가 제게 한 짓을 모두 잊어버리고 편하게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난 오직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그저 그대로 살아만 주었으면.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잠시만. 하고 옷을 잡은 너의 손을 잠시 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에서 가져올 것이 있었다.)
(이번에도 빠져나가는 당신을 본다. 깨끗해진 시야임에도 조금 서러워질 것 같아 눈물을 글썽이다가, 이젠 안경에 직접 손을 대기가 아까워 참아낸다. 손의 거스럼을 깔짝거리며 제 속에서 터져나온 울화, 집착, 미움 등을 긁어와 한 상자에 담는 생각을 했다. 닫히지도 않는 상자를 억지로 눌러 닫으며 떠올린 가정은 이것이 또다시 터져나왔을 때였다. 그땐 이렇게 당신을 묶어두는 것보단...어느새 뜯어버린 거스럼을 털어내고 제 목에 걸린 것을 매만졌다. 당신을 기다리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금방 다시 네 곁으로 돌아와 마주 앉는다. 버석거리는 너의 손을 끌어와 주먹 쥔 손을 그 위에 펴면, 차갑고 묵직한 작은 주사위 하나가 놓인다.) 뺏어가서 미안해. 이건 원래부터 네꺼였는데. 이제부턴 너가 날 이렇게 꼭 잡아줘야 해. 알겠지. 내가 아무리 흔들리고 불안정 할 때도... (물기 어린 눈가를 쓸어주다가 여전히 너의 목을 옭아매는 목줄을 발견한다. 두 손을 그 위로 감싸 잡더니 간단한 손동작으로 찰카닥, 풀어버린다. 빨갛게 남은 자국을 안타깝게 손 끝으로 살살 쓸어주기도 하며.)
(모두가 당신에게서 도원경을 찾을 때 저만큼은 당신의 낙원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 서늘한 무게감을 꾹 손에 쥐어보면, 그제야 완전히 체감되었다. 정말로 당신이 돌아와 제 마음에 닻을 내렸다는 것을. 그러니 제가 늘 당신의 행운을 빌어야겠다. 제 마음이 당신에게 풍랑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풍요와 기쁨만을 줄 수 있도록.) 그럴게요. 노력할테니까.. (제 목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간지러운지 움찔거렸다. 아파야함에도 복에 겨워 간질거림만 알아 해사한 낯으로 돌아오며 당신의 두 손을 마주 잡아왔다. 어느새 주사위는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았지만, 그토록 서럽지는 않았다. 살랑살랑 당신의 손을 가볍게 흔들며 그 무게감을 가늠하다가 꾹 붙들고.) 언제든 제게 형의 곁을 허락해줘요. 제가 형에게 돌아갈 수 있게끔, 제가 형을, 형이 무섭지 않게 붙잡을 수 있게끔. 그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어요?
(매서운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한들 너는 나의 아름답고도 무서운 낙원이자 안식처. 유일한 집이었다. 두 손으로 그 얼굴을 감싸며 환하게 고개 끄덕인다.) 내 옆자리는 언제나 너를 위해 남아있을거야. (사랑해. 작게 속삭이며 두 볼을 끌어와 입술을 포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