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함

(어두운 공간 안 차가운 벽에 등이 눌린다. 앞에는 바짝 다가온 너의 목과 어깨로 시야가 가로막히고, 조금만 움직여도 곱슬한 앞머리가 네 얼굴을 간지럽히는 꼴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이 비좁은 곳의 습습한 공기를 꿀꺽 삼킨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복도를 지나다가 모종의 이유로 학교에 들어온 너를 만났고, 또 하필 그 순간 기숙사 사감이 복도 어귀를 지나가서였던가. 급한대로 눈을 빛내며 옆에 있는 길쭉한 사물함 하나를 아무거나 열어 두 몸을 밀어넣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제 낡은 사물함의 걸쇠는 녹슨 소음만 내며 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함이 잔뜩 섞인 시선이 네게로 향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나즈막히 들린다.) 미안. 나 때문에 이렇게 됐네.
일이 생겨서 따로 복귀하겠습니다. 네, 보고할 때 뵙겠습니다. (혹여 당신에게 내용을 흘릴까, 두 손가락으로 제 귀에 인이어를 우겨 넣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 일의 근원인 당신을 저도 모르게 힐끔거리면, 온통 복슬거리는 검은 머리칼 뿐이라 미간을 찡그린다. 당신 때문이 맞으니, 별다른 대꾸도, 질책도 일단 삼켰다. 정말 잠긴 것이 맞는가? 이젠 무용한 인이어를 끌러내린 손을 양해도 없이 당신의 옆구리 사이로 넣고 달칵 돌려보지만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만 연이어 울릴 뿐이었다. 결국, 당신의 어깨 너머로 두었던 고개도 도로 뒤로 물려 사물함의 벽에 툭 기대었다.) 별 일이네요. 선배가 갇히는 날도 있고.
(허리 사이를 파고드는 무언가에 몸을 화들짝 떨자 사물함의 벽이 덜컹, 하고 한번 흔들린다. 사부작거리는 옷감 소리도 너무 가까이서 들려. 이제는 마주볼법한 얼굴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앞머리 뒤로 숨기고 있었다. 어둡지 않았더라면 그 빛깔까지 들켰겠지.) ...나 때문에 혼나는거 아니지. 늦게 복귀했다고. 애초에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온거야? 사감 순찰 시간은 알고 있을텐데.
글쎄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탓에 길어지는 공백을 괜히 헛도는 금속음이 채웠다. 사감이 오는 바람에 갇혔다하기엔 밖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당신의 숨소리에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될 정도로. 당신의 표정을 살필 수 없으니 그 답답함은 더 했다. 발끝으로 체중을 옮겨 무릎을 굽히고 사물함에 몸을 완전히 기대면 눈높이는 맞았지만, 인이어의 깜빡이는 불빛은 어렴풋이 당신의 볼만 비출 뿐이었다.) 모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알아봤자 선배가 위험해지기만 할텐데.
나도 이제 너희 쪽에서 일하는 걸. 내가 도울 수 있는게 생기면 너도 좋을텐데. (아까부터 너와 최대한 닿지 않게 몸에 힘을 넣고 있어서, 전완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교차한 두 다리 중 너의 것이 자세를 바꾸며 앞섬을 꾸욱 압박하자 숨을 흡 멈춘다.)
선배의 도움이 필요했으면 이야기 했을 거에요. (이런 도움은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당신을 살필 생각이 없으니, 자세를 바꿀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해결책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인이어를 통해 구조 요청을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의 어깨 너머를 살피던 눈동자가 굴러 당신에게 꽂힌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설명하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그보다 당신의 호흡이 멈췄다. 피냄새가 날 리는 없는데. 제 코 끝을 제 어깨 부근에 가져다댔다가) 저한테 냄새 나나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네가 입은 점퍼가 바스락거린다. 그 소재의 특성상 두 사람이 좁은 공간에 있다보면 후덥한 열기가 차올랐다. 자연히 너의 낯선 체취가 짙게 올라왔고 제 머리를 천천히 어지럽혔다. 거리상으로 본다면 다를 바는 없었지만, 너를 끌어안은 것 같았다. 마치 어제 밤의 터무니없는 여름 꿈에서 처럼. 쓸데없는 장면이 스쳐가서 저도 모르게 중심을 놓지고 발을 밟아버렸다. 반사적으로 네 허리를 꽉 붙들고 안색을 살폈다. 작은 틈새로 빛을 받은 네 얼굴을 이제서야 마주하게 된다.) 아,.. 미안. 아팠어?
(건조한 무표정이 사물함 틈새의 선명한 빛 탓에 훤했다. 그저 느끼기에 무언가가 제 신발을 눌렀다가 허깨비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그보다 당신이 발을 옮기는 탓에 교차 되어있던 서로의 발이 이젠 제가 당신의 발을 감싸는 형국이다. 느릿하게 고갤 저으며 당신의 소매 위로 팔목을 잡아 제 몸에서 떼어낸다. 그날의 껴안음은, 어제 당신의 헛된 꿈인 것처럼.) 갑자기 왜 그래요?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요?
으음, 딱히. 능력을 써보고 있는데... 이상하네. 도통 열리지 않아. (본인 입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저는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항상 제게 좋은 선택을 대신 골라주는 짓궂은 행운이, 이번에도 저를 시험에 들게 하는 모양이지. 떨쳐낸 손이 허공...이라고 할 공간도 없는 곳을 배회하다가 결국 어정쩡하게 네가 기댄 벽을 다시 짚는다. 너를 여기에 가둔건 다름 아닌 나였다.) 여기 자물쇠는 네 능력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까?
(당신의 행운을 그저 이능이라고 여기기에 외려 온전히 당신의 탓을 하지 못했다. 그저 제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뿐. 당신의 손이 제 옆구리 부근에 닿자,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이나 지금이나 당신 앞에서 소리 내어 웃을 일 없다는 걸 빼면 거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날 이후, 제 몸에 남은 흉처럼 저는 완연히 부숴졌고, 당신을 불신할 것이며,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젖어버린다면, 그거야말로 거짓이고 허망한 착각일 뿐이다. 어떻게든 떨어뜨리고자 밀어내는 말이 비소처럼 나왔다.) 문짝을 터트릴까 생각은 해봤어요. 여기서 선배랑 같이 죽겠지만요.
(흐흐, 작게 실소를 흘렸다. 너가 원래 이렇게 냉소적이었던가. 아무래도 그날 이후였나보다. 아직도 제 기억속에는 저를 선배로서 동경하며 올려다보던, 덤덤하지만 순한 표정이 남아있었는데. 시선을 도록 굴리자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놓인 너의 얼굴 위 흉터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시선으로 어루고 살피듯 그렇게 한참을.) 나 같은 사람이랑 같이 죽으면 평생 후회할텐데.
(늘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허탈한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프리고 하순을 무는 것 모두 당신에게 보여야하는 것에 반해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제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당신과 있을 때면 저혼자 안대를 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당신과 죽으면 저는 후회할까, 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선배랑 함께 죽는 걸 제가 후회했으면 하나요? 어쩌면 선배는 살아남을지도 몰라요.
난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너가 그런 복수를 원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나랑 같이 있는 한 너도 안전할거야. 그건 장담할게.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을 푸근하게 휘어진 눈이 담는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네가 편하게 공간을 차지하도록 경직된 몸을 고수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끙, 작게 성음 내며 잠시만, 하고 속삭이던 펠은 몸의 힘을 살짝 풀었다. 그에 바로 너와 맞닿은 허벅다리에 힘이 더욱 실렸고. 제발 너가 몰랐으면 했는데. 외면하듯 눈을 살짝 감는다.)
제가 원하는 복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젠 복수를 원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거짓으로 담은 용서가 진실이 되어버린 양, 온순하게 구는 당신 탓에 허연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분명한 점은 지금 당장 이 곳을 빠져나가기란 요원한 일이라는 것과 이 자세로는 당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점. 아무래도 불안정한 사물함 문에 기대기란 어려울테니까, 당신을 끌어와 제게 기대게 했다. 그때도 당신을 안았을 때,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저 더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당신의 것이 뜨겁게 맞닿아도 그것일거라 생각 못하고 그저.) 조금 더워도 참으세요. 방법을 찾기 전엔 체력도 보충해두시고요.
...!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허리가 팔에 감겨 너의 점퍼에 폭닥 묻힌다. 고개가 교차해서 망정이지. 노오랗게 튀는 눈이 밝아서, 덕분에 제가 어떤 표정이 되었는지 숨길 수 있었다.) 그... 어. ...안 불편해? (싫을텐데. 이렇게 나랑 있는거. 두근거리는 가슴이 너의 것과 그 때처럼 맞닿았다. 계속 어정쩡하게 서있기도 뭐해서, 벽을 짚고 서서 네 어깨에 턱을 슬며시 기대었다.)
뒤에 배낭이 있어서요. (배낭이 이 비좁음에 한 몫하긴 했지만, 벗기엔 더 곤란한 거리였다. 그럴 바엔 이렇게 쿠션으로라도 쓰는 것이 낫지 않나. 계속해서 합리화를 하는 것도 생각 못하고 제 귓가로 힐끔 시선을 두었다. 당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자각할 정신이 무언가에 매몰되어있었고, 지금은 지나치게 제정신이니까. 제 점퍼를 꾸욱 쥐었다 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나마 저를 편안하게 하여 한숨을 쉬었다.) 조금 쉬고 나서, 사물함 문 한 번만 부탁해요. 지금 제 이능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머리칼이 너의 옆 얼굴에 스친다.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너를 향한 작은 두근거림에도 죄가 실리고 길 잃은 애정은 저를 이런식으로 우리 둘을 강제로 가두어놓는다. 이렇게 가까이 가슴을 맞대고 있을 시간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 없겠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찬찬히 골랐다. 철제 문 틈으로 어렷품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채웠다. 이제 슬슬 해가 지려는 모양이었다.)
(점퍼에 넣어둔 주사위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 늘 당신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밀어냈음에도 결국 당신의 손을 빌리게 되는구나. 고작 장미 한 송이를 얻고자 장미덤불을 한아름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대화를 복기하던 제가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좋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당신은 제가 건네준 것이 수틀리면 당신을 가루로 만들 폭탄임을 알면서도 품에 들고 다닌다. 저를 믿는 것처럼 행동했으면서 결국 돌아온 결과는 저를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멋대로 제 속에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 (너한테선 처음이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흐흐 웃는 소리나 흘렸다. 그야 저는, 아무도 배팅하지 않는 말에 모든 걸 걸어버리는 사람이니까. 참으로 이상한 사람 둘이서 이리도 지독하게 엉겨있었다.) 나랑 계속 있다보면 그런 것도 익숙해질거야.
... (그래, 이 떨림은 당신의 웃음 탓에 전해지는 진동일 뿐, 아무것도 아닐거야. 답지않게 당신의 눈 밖에서 지독하게 도망치려 발버둥친 곳이 결국 당신의 품이다. 당신의 단언은 기묘하기도 했다. 무턱대고 잘될 거라는 기원과도 같이.)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여기게 되잖아요.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아요.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뜬다. 너의 일상 안에 내가 자리잡는걸 거부한단 뜻일지, 아니면 제가 부리는 요술을 소홀히 여기고 싶지 않다는 것일지. 괴던 고개를 뒤로 물려 너를 어둠 속에서 마주하면, 두 숨결이 훅 맞닿인다. 그 사이 안정을 되찾은 눈동자엔 복과 별이 가득 담겨 빛나고 있었다.) 너가 기회만 준다면. 난 얼마든지 상관없어.
(지구에서는 내내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말처럼, 당신이 제 시선 밖을 벗어나는 일은 없겠지. 지금도 인력에 이끌리듯 당신의 고개짓을 따라 몸이 움직였다. 당신이 내쉰 숨을 고스란히 들이킨 제가 호흡을 잊을 차례였다. 당신의 온기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닿아선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품에 넣고 싶은 것은.) 선배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요. ...그렇게 이야기하시고 또, 절 버리실 거잖아요.
... (이미 깨져버린 파편이 또 다시 날카로운 소음을 낸다. 정말로 너가 나에게 단 한번만 다시 기회를 준다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염원은 입 밖을 나오지 못하고 간절한 두 눈에 담긴다. 이제는 온 몸을 진동하는 이능을 한 손에 집중시켜 등 뒤 철제 문 위로 올린다. 그렇게 간단히 힘을 주면. 덜컹. 열린 문 사이로 찬 밤의 공기가 들어와 둘 사이를 훅 갈라놓는다.) 어서 돌아가. 동료들이 걱정하겠어.
(저를 휘감는 공기가 이리도 차갑게 느껴졌던 적이 또다시 있을 줄이야. 찰나의 열기가 사라지고 달빛이 우리 사이를 채워도 당신의 얼굴은 역광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할까, 이대로 밀어내고 이 자리를 떠야할까, 어느쪽이든 당신과 닿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데. 우당탕, 두 사내가 사물함에서 쏟아졌다. 깊은 밤, 인적이 드문 복도라 어찌나 다행이던지. 물론, 타는 듯한 얼굴을 들 수 없는 쪽팔림은 제 몫이었다.)
...! (휘청, 몸이 뒤로 넘어간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찬 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그 찰나에도 네 몸을 꽉 붙들어 감싸안는다. 훨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뼈 하나 부러지지 않는 몸이 조건반사처럼 한 행동이었다. 한껏 둥그렇게 놀란 눈이 제 위로 올라온 너를 찬찬히 살피다 활짝 휘어진다. 이어서 큭큭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이거, 나름의 복수?
(옆의 빈 바닥을 짚어 당신의 품에서 고갤 느리게 떼어낸다. 엎어지는 바람에 뒤집어 쓴 후드가 거센 도리질에 벗겨졌다. 벌건 낯이 홧홧하다. 삐뚤어진 안경 아래로 한 손을 넣어 마른 세수를 하면서도, 제 손가락 끝에 걸치는 차가운 감촉에 제가 흘린 주사위라 여겨 제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세게, 부딪친 것 같은데 괜찮아요?
으응, 괜찮은데... 그, (제 시린 손마디를 냉큼 잡아다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행태엔 저도 모르게 말 끝이 흐려진다. 네 손은 참 따뜻하구나. 옅은 홍조를 띠며 대체 뭘 집으려다 그런건지 시선을 돌리면, 제 곁에 익숙한 다면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흐흐 웃으며 잡혔던 손을 빼내어 그걸 집는다. 털썩 뒷머리 편하게 뉘어버리고 그걸 집게손으로 눈 앞에 가져온다.) 이걸 여태 들고 다녔구나.
(주사위가 제멋대로 제 손 안쪽을 간지럽히며 빠져나갈리는 없으니까, 가라앉을 일 없는 홍조를 여전한 채 한숨을 폭 쉬며 제 안경을 고쳐 쓴다. 적당한 목걸이를 찾지 못해 주머니에 들고다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당신에게 곧게 펼친 손을 내밀었다.) 선배도 들고다니시잖아요. ...돌려주세요.
내 껀 주머니 안에 잘 있으니까. (빙그레 웃으며 제 위에 올라탄 너를 여유롭게 올려다본다. 주사위 쥔 손이 주먹을 챱 쥔다. 바로 돌려줄 생각은 없다는 듯이. 어때? 부적이 좀 효과가 있었어?
(당신의 이능을 생각하면 잃어버리기가 더 어렵겠다만, 당신의 주머니 쪽을 힐끔 보았다가, 제 주사위를 삼킨 당신의 주먹 아래에 제 손바닥을 받쳤다.) 글쎄요, 이건 선배의 부적인데 제게 효과가 있을리 없잖아요.
나한테서 행운이 좀 묻어갔을거라 생각했는데. (으음, 하고 작게 성음을 낸다.) 부적의 형태로 상대방에게 행운을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건 아직인가봐. ...그럼 도로 가져갈까?
선배가 콩고물도 아니고 이능이 어떻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할지, 게다가 이미 줘버렸으면 제 것인데 왜.., 당신의 고개 옆을 짚어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긴 뒤, 두 손가락으로 당신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지탱하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감쌌다.) 애초에 부적으로 가져간 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남에게 부여할 수 있어야 모든게 의미가 있는걸. (사뭇 진지한 표정이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큼직한 손이 주먹을 덮어버리면 하는 수 없이 손아귀 힘을 풀 수 밖에. 스르르 손가락을 벌렸다.) 난 그 용도로 준 건데. 그럼 넌 왜 가져간거야?
선배가 줬으니까요. 선배라고 생각하고 가져갔어요. (옅은 홍조가 남은 채 시린 달빛을 받은 담담한 낯이 속삭이듯 고했다. 끝끝내 답안을 작성하지 못한 시험지마냥 당신의 손을 놓지 못했다. 조금만 더 알게 된다면 제 마음도 확실히 정의할 수 있을텐데.) 의미는 제가 부여하기 나름 아닌가요?
(그 의미가 궁금했는데. 너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거두어 갔던건지가. 시린 나의 달님을 올려다본다. 아주 어렷품이 햇살의 흔적이 남아 그 빛은 부드럽고 따뜻해보였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달이 차고 냉랭한건 다 거짓말이다. 손에서 옮겨간 온기가 제 몸을 덥히고 있는데. 손을 열어 주사위를 꺼낸다. 그리고 너의 손을 잡아 그곳에 가만히 쥐여준다.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듯. 제 명줄을 네게 고이 맡기듯.) 그러면 더 잘 간수해줘. 이게 정말 나라면 말이야.
(제 손아귀에 떨어진 무게에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라던 것이 제 손에 들어왔음에도 당신에게 고정된 시선이 떨어지지 않듯이. 본래 달빛은 태양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당신이 그리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설령, 그것이 달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제 것이라 착각하고 덥썩 삼켜버렸던, 겁화와도 같은 일광이었으니. 제 손바닥에 숫자가 남도록 꼭 쥔 손을 천천히 제게 끌어왔다.) 적당한 걸 찾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