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

(너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아쿠아리움 입구에 도착해 원통형 탱크 앞에 선다. 할랑한 여름용 갈빛 줄무늬 스웨터를 회색 청바지에 넣어 입은 그가 너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천천히 네게로 다가간다.) 설아, 생일 축하해.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민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해바라기 한 송이였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눈이 가볍게 뜨이는 그런 날. 물론 오늘은 예정된 좋은 일이 있었다. 흰 티셔츠에 널널한 남방을 가로지른 메신저 백. 그리고 적당한 5부 반바지까지. 시간 맞추어 온 것임에도 미리 도착한 당신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다.) 아, 고마워요. (많이 기다렸냐는 제 물음보다 더 빠르게 전해지는 당신의 축하에, 속절없이 뺨을 붉힌다. 당신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데, 늘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제게 쥐어주려고 해서, 제가 충분히 화답할 수 있을까 분에 겨운 걱정을 하게 된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막상 형에게 축하를 받으니까, 무척 기쁘네요. (당신의 사랑을 손에 쥔 그의 얼굴은 티없이 맑아 유난히 그늘 질 일이 없었다. 당신과 함께하여 행복하리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것이 어떤 날이든.)
꽃 선물을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고민했네. 그래도 일년에 한 번인 생일인데, 꼭 제대로 축하해주고 싶었어. (예쁘게 색이 물든 너의 볼을 눈에 담으며 베시시 웃는다. 갈까? 작게 덧붙이곤 네 손을 살며시 그러쥔다. 어둑한 입구로 들어서면, 평일 저녁인 탓도 있겠으나 오늘은 유난히 내부에 관람객이 적은 듯 보였다.)
형 덕분에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사실, 꽃 선물을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만, 정말 앞으로 그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다. 그걸 제게 주는 당신이 만개하 듯 선명하고 고왔기에. 살며시 잡힌 손을 놓치기 싫어 힘주어 고쳐 잡는다. 작은 수조로 나뉜 그 공간에는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난히 유명한 흰동가리부터 나비고기까지, 각 안내판 마다 아기자기한 이름과 탄생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시선을 빼앗긴 듯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형 생일은 언제에요?
내 생일? (수조로 눈을 돌린 그가 잠시 말이 없다. 물결 무늬의 조명이 은은하게 투영된 얼굴은 잠시 옛 기억 속을 유영하는 듯 보였다.) 4월 13일. 기록상으로 그렇게 나와있었대. 아직 한참 남았지?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생일을 챙겼던 기억이 있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으며, 만약 기억한다 하더라도 커다란 이벤트가 있지도 않았으니. 그럼에도 아쉬운 기색이 없는 이유는, 능력이 발현된 이후로 생일날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성대하기만 했던 탓이다.)
(당신의 얼굴에 일렁이는 물그림자는, 단순 조명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담고 있으리라는 감상이 든다.) 이미 지나버렸네요.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건데. (당신에겐 어떤 선물이 좋을까. 당장 떠오르는 건 미역국과 잡채 뿐이라,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 받아보니 꽃다발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각자 어떠한 기억에 잠긴 채로 수생 생물이 가득한 수조를 지나칠 때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한 것들이 눈에 띈다. 동글동글한 마리모였다. 미신이라곤 하지만, 지나치게 좋은 때이지 않은가.) ...형. 제 눈 좀 봐봐요.
다음에 챙겨주면 되지.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응?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베시시 웃는 낯이 너를 돌아본다. 숨길 수 없이 반짝이는 두 눈이 드러난다. 어째 적막이 좀 어색한걸. 쑥쓰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옆의 수조를 구경한다. 괜히 다른 소리나 하며.) 얘네 광합성 하러 나왔나봐. 동글동글 귀엽다.
... (저를 돌아보는 당신의 양뺨을 꾸욱, 눌렀다가, 이마에 짧게 입을 부딪친다. 제 응석이라면 전부 들어줄 것처럼 굴면서도 유난히 당신은 이런 면에선 일절 양보가 없어서 얄미웠다. 안내판에 따르면 당신의 말도 맞았다. 기분이 좋은 건 미신이라나, 그래도 드문 일이라 행운을 준다는 속설도 여전하다고...하지만 당신의 시선을 따라 합주마냥 떠오르는 마리모들이 여전히 걱정이 된다.) 단체로 햇빛 보러 나왔나보네요.....저희 가면 가라앉긴 하겠죠?
우웃.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 한참 눌리는대로 구겨졌다가 뽀뽀로 끝나면 다시 활짝 펴진다. 그 때 마리모들 중 하나가 물 밖으로 살짝 튀어오를 정도로 떠올랐던 곳 같은건 기분 탓이겠지.) 큼, 다음 방으로 갈까? (네 손을 잡고 걸음을 조금 빨리 하면 조명이 더욱 어둑한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원통형, 그리고 얇은 판 명의 다양한 수조 안에는 하얀색 덩어리들이 마구 모여 색색깔의 조명을 받아 알록달록하게 유영하고 있었다.) 저것봐, 해파리들인가봐.
(...정 아니면 관리자분들께서 친히 넣어주시지 않을까. 퐁, 하고 떠오른 마리모를 보지 못해 속 편한 생각이나 했다. 당신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해파리들이 느긋하게 유영하고 있다. 당신의 손짓을 따라 바쁜 물고기들과 달리 하릴없이 떠다니는 것들을 보면 조금 평온해진 기분이 든다. 어느 안내판에 멈춰선 그는 문구 하나를 짚어본다.) 어떤 해파리는 자연사를 하지 않아서 영생을 산대요. ...형은, 어떨 거 같아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안내판 하나하나를 세세히 읽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마저 설이 너답다는 생각을 한다. 꽤나 재미있는 질문엔 수조 안을 떠다니는 흰 유령들을 지켜본다. 영생을 얻었다면 그와 다를바 없지.) 영원히 사는 친구들이 곁에 이렇게나 많다면 그 나름대로도 즐겁겠다. 바다가 늙어가는 모습도 다 지켜볼테고. 그게 아니라 나 혼자라면... (너를 붙든 손이 반지 부근을 만지작거린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저도 혼자 영원히 사는 건 싫을 것 같아요. 오래 산다고 꼭 좋은 법은 없으니까. (제 반대쪽 손에 들린 꽃을 본다. 돌아가자마자 영구적으로 보관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혹여나 영생을 산다면. 모든 사람이 꽃처럼 짧은 삶을 산다고 여기게 된다면. 당신의 반문도 이해가 됐다. 그렇게 생각해 욕심을 부리자면 당신보다 딱 하루를 더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이기적이게 굴자면 당신보다 딱 한시간만 덜 살고 싶었고.) 바다..좋아해요?
그런 능력의 센티넬도 존재한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아. 외롭겠지, 아마. 다행히도 수조 속의 이 친구들은 뇌가 없어서 그런 것도 못 느끼겠지만. (흐흐 웃으며 커다란 탱크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얇은 벽 형태의 수조를 너와 나 사이에 두고 걸어보면, 너의 얼굴 위로 물방울과 해파리가 눈부시게 드리운다. 너가 심해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얼마든지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 자주 가보진 못했어. ...설이 넌?
...이 아이들에겐 다행인 일이에요. (제가 얽었던 당신의 손이 매끄럽게 빠져나가고, 당신은 건너편으로 멀어진다. 차가운 조명이 당신을 비추고 유리 너머, 부유하는 것들 사이에 당신이 서있는 것을 보면, 잔혹하리만치 아름답다. 예전처럼 당신의 형상을 감히 어루만질 용기가 들지 않는 건, 이미 그 촉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꽃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부지불식간에 허상에 미혹된 저를 깨운다. 그것이 해파리들에 가려 찰나였기를 바라며. 어차피 모르는 것이, 당신에게 좋을 것이니.) 어릴 적에나 가본 거 같아요. 나중에 바다도 가봐요. 우리.
물고기들 보니까 가보고 싶어졌어? (베시시 웃으며 한 걸음씩 물길을 지나쳐간다. 너와 함께 그렇게 발을 맞출 때마다 해파리가 제 눈 앞에서 너를 감추고 다시 보여주기를 반복한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담기기 까지 너와 내가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던 것 처럼. 그 찰나의 순간이 뭐라고 네가 보이지 않으면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너도 알다싶이... 우뚝. 수조의 끝에 다다라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너와 내가 두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눈매를 둥글게 휘며 미소 그린다.) 같이 가자. 물놀이도 하고, 밤에 불꽃놀이도 하고.
그냥. 바다가 늙어가는 모습을, 형이 보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바다에겐 찰나라도 시간은 지난 거니까. (수조 너머의 당신과 대화를 나누며 걸음을 내딛는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저에게 맞춘건지, 제가 당신에게 맞춘건지 알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끝에서 당신을 만나면, 달음박질이라도 한 듯, 심장이 뛰었다. 당신을 함부로 껴안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오른손을 내밀어본다.) 해산물 좋아하시면 맛있는 것도 먹어요. 사진도 찍어드릴게요.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본다. 너는 항상 내게 구원의 여지를 내민다. 깊은 늪을 제 집 삼는 제게 너는 함께 하는 희망을 알려주지. 그게 깊은 심해라도 나는 언제나 너의 손을 잡고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모르는 사이 너라는 파도에 목 끝까지 잠긴 탓이다. 깍지 쥔 손을 살살 어루며 다음 방으로 나선다. 벽에 적힌 안내판과 선선해진 습도로 보아 악어와 뱀이 사는 곳으로 보였다.) 그러고보니 우리 같이 사진 찍은 적이 없네. 음... 난 뭐든 잘 먹어. 설이는 못 먹는거 있어?
아쉽지 않게 있다가 찍어요. (당신이 잡은 제 손을 본다. 그에 전해지는 온도도 느껴본다. 저보단 약간 서늘하나 호흡하는 사람의 온도를. 덕분에 그 날의 벌건 기억을 아름답고 푸른 색으로 덧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닻처럼 당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테고, 당신은 언제나 하늘이 아닌 제 곁에 머무를테니. 당신의 물음엔 고갤 젓는다. 좋아하는 음식은 있어도, 싫어하는 음식은 없었다.) ...그러게요. 형은 급식실도 자주 가시더라고요.
아. 봤구나? 난 진짜 주는대로 잘 먹는 편이라... 이상하다, 그러고보니 나는 널 못 본 것 같았는데. 설이 너 급식 잘 안 먹지. (졸린 악어가 누워있는 수조 앞을 지난다. 여느 파충류가 그러듯 공룡의 흔적을 증명하는 듯한 그 생물체가 신기해서 시선을 한참 주다가 옆의 다른 수조로 돌면 커다란 아나콘다가 검은 또라이를 틀고 누워있다.)
(봤냐는 말에 어깨만 으쓱거린다. 애초에 식단표를 확인하곤 급식실을 간 적이 없으니. 가는 날은, 케이크나 단 것이 나올 때 뿐이니, 한 달이 될까 말까 했다. 아나콘다의 팻말을 보면, 식사 주기가 1달에서 2달..음, 이 이야기는 안해야지 싶다.) 학교 급식은 워낙 이상한 게 많았잖아요. 슬라임죽...픽시 날개 무침.. 좀비 구이.......형이 잘 먹는 거에요.
이름은 그래도 꽤 먹을만 했는데. 물론 내가 가는 날엔 재료 다 떨어졌다고 멀쩡한 메뉴로 바뀌어 나오는게 부지기수였지만... 그럼 너는 밥을 어떻게 해결했어? 매점? (너가 마른거엔 이유가 있구나? 덧붙이며 장난스런 미소 띠고 네 옆구리를 잼잼 쥐어본다.)
그거야말로 맛이 멀쩡하지 않다는 반증이잖아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당신을 밉지않게 흘긴다. 잡혔던 허리는 몸을 비틀며 도망친 상태였다. 와중에 손은 놓치 않아 팔만 죽 뻗어 터널 수조 입구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매점에 맛있는 빵이 많던 걸요. 급식 예산이랑 매점 예산은 분명 별개였는데…
달달한 디저트로는 허기가 안 채워질텐데. 이제 너 밥 잘 먹나 안 먹나 챙겨야겠다. (웃음 흘리며 이어진 팔을 따라 마저 걸음을 옮겼다. 다시 나란히. 발 아래 이동하는 판을 밟고 푸른 빛이 일렁이는 터널 속으로 들어서자 노랑 가오리가 둘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만든다. 몸체만한 그루퍼가 눈알을 굴리며 우리를 구경하고 지나가고, 이따끔씩 바다거북이가 곁을 스쳐지나간다.) 에쁘네.
이왕 배 차는 게 똑같다면 맛있는 걸 먹고 싶었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돌려말해 여전히 밥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는 이야기기도 했고. 위를 지나가는 생물들이 그림자를 만들 때마다, 당신의 눈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가 햇볕의 윤슬이 되었다. 가오리가 당신의 뒤를 지나치며 웃어보여도, 시선을 뗄 수 없는 풍경이라.) 그러게요. 예뻐요.
이렇게 보면 설이 넌 바다 속도 참 어울려. (고요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물 속. 그러나 투명해서 모든 것이 보이고, 조금만 용기 내어 그 안으로 몸을 담가보면 알록달록한 산호 정원과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아 숨쉬는걸 볼 수 있는 깊은 바다. 너는 그와 닮아있었다. 그 모든 아름다운게 곁에 있어도 넌 오직 제게로만 검은 눈을 고정하지. 아무도 없는 아늑한 터널 아래에서, 이끌리듯 네게로 고개가 다가가다가... 일순간 다시 멀어진다.) 어, 저기! 귀상어야. 봤어?
(그리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이다가 당신이 다가오는 순간 숨을 멈춘 채 바라본다. 명백하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 듯, 어린 마음에 얼굴을 붉히면,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당신의 말에 따라 상어를 찾듯 주변을 둘러본 그가 당신의 볼을 감싸고 하순을 짧게 머금었다가 느리게 놓는다. 바다 속을 들여다 볼 만큼 가까이 다가왔으면 파도에 젖을 결심도 해야하는 법이다.) 아뇨. 못 봤어요. 다음에 보이면 알려주세요.
(느닷 가까워진 얼굴이 입맞춤과 함께 떨어지면 조금은 멍하니 귀를 붉혔을까. 그래, 정말로 바다라는 건 그런걸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저편으로 떠내려가게 되는. 마치 내가 너에게 빠져버린 것처럼. 어느새 둘의 주변으로 모든 바다 생물이 모여들어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상어는 물론이고, 가오리, 복어, 거북이, 심지어 유리벽에 붙은 불가사리까지.) ...조금 부끄럽다. 그치.
이런 동요를 들어본 거 같은데. (코끼리 아저씨랑 고래아가씨가 결혼한다는 그 동요 말이다. 부끄럽기보단 얼떨떨한 표정이다. 혀라도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짖궂은 탐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당신의 말에 참아본다.) 덕분에 귀상어 봤잖아요. 저게 그 상어에요?
으응, 쟤야. 신기하게 생겼지? 망치상어라고도 한대. 약간 외계인처럼 생기기도 했다. (구경거리가 끝났는지 바다 속 하객들이 하나둘씩 물러난다. 저희 머리 위를 유유히 헤엄쳐가며 하얀 배를 보이는 길쭉한 귀상어를 올려다보면 어느새 무빙워크에 끝자락에 다다라있다.)
귀여워요. (외계인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짓게 된다. 자기는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그러니 당신과 하고 싶은 일들이 자연히 늘어나나보다.) 다음은.. 극지방인가봐요. 펭귄들 볼 수 있겠네요.
누구는 무섭다고들 하던데. (귀엽다는 반응이 신기한 듯 웃는다. 걸음을 마저 옮기면 하얗고 쌀쌀한 배경의 유리창 너머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작은 아카스펭귄들의 무리가 보였다. 아래의 안내판에는 사육사가 애정을 담아 붙여놓은 각각의 사진과 이름이 있었다. 안내판을 가볍게 훑어본 그가 작게 감탄한다.) 얘네, 일부일처제라서 한번 고른 짝이랑 평생 함께한대.
형을요? (당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던데. 사람은 다양하니까. 미묘하게 주어가 어긋난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생각으로 넘긴다. 당신의 옆에 꼭 붙어 안내판을 꼼꼼히 읽고 고개를 끄덕인다.) 낭만적인 동물이네요. 동물이 그러기 쉽지 않을텐데.
(질문에 눈을 어리둥절하게 키웠다가 농담으로 치부하며 큭큭 웃는다. 유리창에 가깝게 다가서서 내부를 구경하다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졸고 있는 펭귄 둘을 가리킨다.) 쟤네 둘이 한 쌍인가봐. 어떡해, 귀엽다.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너와 펭귄을 번갈아본다. 그러다 약간의 침묵 뒤엔,) 춥고 열악한 환경일텐데. 서로를 잃어버리면 그 땐 어떻게 되는거지?
(당신의 들뜬 옆모습이 오래 지나지 않아 변하길래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그런 다정한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싶다.) 많이 그리워하고, 또 슬퍼하겠죠. 그래도, 계속 서로를 찾아다니다보면.. 다시 만나지 않을까요.
저 느린 걸음으로 하염없이 걸어서. (그러고보니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우리도 결국 이 자리에 이렇게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잠에서 깬 두 펭귄이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걸 지켜봤다. 시선을 조금 돌리면, 다음 공간은 물개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아무리 느려도,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속으로 잠시, 펭귄의 수영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런 이야기보단, 당신의 머리를 살살 쓸어준다. 몇몇 물개들은 물 속에서 첨벙거리고, 몇몇 물개들은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 중 유난히 위풍당당한 객체를 콕 집어본다.) 저 친구가 여기 우두머리 인가봐요.
그러게, 덩치가 남달라. (머리를 위로 우뚝 쳐들고 우람한 몸매를 자랑하는, 바위 위 한 포대의 물자루를 바라본다. 푸짐한게 귀여워서 더 가까이 보고싶은 마음에 유리창에 손을 가져가댄 순간, 유리 반대편에서 검은 코가 다가와 그 부분에 콕 닿는다.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주위에서 물개들이 호기심 어린 동그란 눈을 하고 하나 둘씩 다가오고 있었다.)
코 자국이 남았어요. (당신 손끝에 남은 자국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쩜, 아까부터 하객이 많은 것 같지. 그래도 수영하며, 열심히 굴러오며 모이는 물개들이 귀엽긴 했다.덩그러니 남아있던 우두머리 조차 여기까지 왔으니.) 진짜 결혼할 때도 동물들이 하객으로 오면 어떡하려고요.
너만 허락해준다면 난 상관 없어. (활짝 웃으며 너와 물개를 번갈아본다. 유리창에 묻은 코자국에 귀여워,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 이 친구들, 너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부를 이도 많지 않은 거, 차라리 동물이 낫지 않나 싶다. 적어도 귀여우니까. 어깨를 으쓱이다가 오통통한 몸들을 쿡, 가르킨다.) ....어디가요? 저 살쪘어요?
...푸흡, (생각치도 못한 물음에 묘하게 구각이 비틀리더니 결국 꺄르륵 웃음이 터진다. 이건 마치 햄스터가 뚱뚱하냐고 묻는 그 영상이 얼핏 떠올라서. 조금 추스르고 난 눈꼬리엔 옅은 물기까지.) 아니이, 말랑하고 동그란 눈이 귀여운게 너잖아. (네 볼로 손을 뻗어 아주 살짝, 검지로 볼을 콕 누른다.)
(당신의 웃음이 확정처럼 들려서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다. 기왕이면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름 체중 조절하고 있는 건데도. 당신의 손가락을 잡고 그 끝에 입술을 붙혔다 뗀다.) …안 닮았어요. 빨리 취소해줘요.
그치만 귀여운건 다 너 닮았는데. (말랑한 입술까지. 유리창에 코를 붙인 아이와 겹쳐보이잖아. 불퉁해보이는 표정이 어쩐지 더 놀리고만 싶어진다.) 조용한 물강아지.
(제가 예쁜 것만 보면 당신을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하렘을 만드는 물개는 좀 그랬다. 나는 당신밖에 모르는데. 당신 손끝을 살짝 물었다 놓고는.) 그냥 형 강아지 할래요. 물강아지 말고.
응, 설이는 내 강아지지. (물려도 아랑곳 안 하고 베시시 웃기나 하며 머리를 살살 쓸어준다. 그래도 말야, 이 동그란 머리를 후드가 감싸면 정말 물개를 닮았는데... 여기까지 말하면 너가 싫어할테니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 강아지 이름은 뭘로 지을까.
(아. 예쁨받았다. 당신에게 머리를 온전히 내어주며 당신의 생각도 모르고 그런 생각이나 했다. 당신의 물음을 듣고서야 제가 지나친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깨문 손가락 스윽 닦아주고 깍지를 낀다.) 이름도 따로 지어주시려고요? (다음 구역은 가장 큰 메인 수조가 있는 곳인가보다.)
그럼. 애칭 같은 걸로. 설이는 어쩐지... 쿠키, 같은 달콤하고 귀여운게 어울려. (장난 치고는 조금 진지한 음성엔 옅은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깍지 낀 손을 만지작거리며 푸른 물그림자가 일렁이는 길을 따라 걸어보면, 이윽고 거대한 유리벽 너머의 깊은 바다 한 가운데를 잘라다 빌려온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진짜 강아지 이름이네요. 쿠키. 편한대로 부르세요. (강아지가 제 이름을 정하는 법이 있던가. 대개 주인이 불러주면 그 애정에 저를 부르는 줄 아는 거지. 그 이름이 설령 아주 우스운 것이라도 당신은 달게 불러줄테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럼 저는 형을 주인님하고 부르면 되나요?
(주춤, 함께 맞추던 걸음이 잠시 박자가 안 맞았나보다. 수조 안의 쥐치가 입에서 모래를 우수수 뱉어낸다. 덤덤하게 그런 말을 잘도 하는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걸까.) 주인... 이라, 그거 참 묘한데.
제가 형 강아지면 형이 제 주인인게 당연하잖아요. (당신이 주춤하면 걸음을 멈추고 당신에게 돌아온다.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 싶어, 흘러가는 물고기들, 그 뒤를 따르는 물고기들에게 잠시 시선을 준다. 저 쥐치는 어쩌다 모래를 먹게 됐지...오늘 정말 다양한 장면을 보게 된다.)
(너를 흘끔 돌아보는 얼굴이 푸른 물그림자에 씌여도 여전히 붉었다.) ...내가 널 여기서 쿠키라고 부르는 건 괜찮지만, 너가 이 자리에서 날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건. 어째 느낌이 좀 다를 것 같아.
(아주 사랑스러운 산호초라도 본 것 같다. 침대에서 절 쿠키라고 불리지 않는 한, 영 당신이 말하는 느낌이라는 감이 잡지 못할 듯 싶다만. 당신이 곤란해 보이니까 고개를 끄덕여본다. 다른 화제가 뭐 있을까, 예를 들면.) 여기서 찍을까요? 우리 사진.
아, 그래. 좋아. (기다려온 말이라도 들은 양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찍을만 한 곳이... 머리 위로 점박이 가오리와 타이거 상어가 유유히 헤엄치는 이 곳도 꽤 멋지고 좋았지만, 구석에 놓인 사진 부스가 눈에 들어와 그리로 가리켜보인다.) 저런 건 어때?
(그렇게나 곤란한 말인가. 나중에 단 둘이 있을 때나 불러봐야겠다. 당신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작은 사진 부스가 있다. 고개를 끄덕이곤 그 안에 들어가 패널을 조작해보면, 한 칸부터 네 칸까지 제법 다양한 색과 모양의 옵션이 있다.) 어떤 게 좋아요?
기본으로 가볼까? 그게 제일 귀엽네. (톡, 톡. 네칸짜리 길쭉한 프레임을 고르자 시간초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네 허리를 바짝 감싸 안고 좁은 화면 안에 들어와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당신이 이 좁은 곳에서 저를 와락 안으면 속절없이 얼굴을 붉히고 만다. 훅 들어오는 당신에겐 매번 이렇게 무너지고 말겠지. 환한 당신과 달리 새빨갛게 익은 채 찰칵, 거리는 소리가 난다. 당신의 허리를 마주 감싸 안고는 이마를 톡 부딪친다.) 갑자기 이렇게 안는 게 어딨어요.
(억울한 불만을 토로해도 이쪽은 그저 흐흐 웃을뿐이다. 잔뜩 맞붙은게 두근거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나 태연하게 어깨 위로 팔도 감아 올리는게, 누가 보면 능글거린다 하겠지만 이렇게 귀엽게 익은 너를 두고 어찌 가만 있을 수가.) 여기있어. 사진 안엔 들어와야지. 나 덕분에 잘 나왔을걸?
(제가 카메라를 조절할 수 있음을 당신이 모르지 않을텐데도. 그런 투정어린 눈으로 당신을 빤히 보다가 이어지는 말과 당신의 태도에 결국 웃음이 나왔다. 이전보단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찍힌 사진. 카메라를 살짝 조정하며 당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입 맞춰도 되나요?
이렇게 다가왔으면서 뽀뽀도 안 하려고. (아무도 없는 포토부스로 너를 부른덴 다른 이유도 있는걸. 순수한 너는 모르겠지. 하순으로 제 입술을 꾸욱 누르곤, 살살 부비듯 우물여본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으려나. 일부러 입술을 금방 물리지 않았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려는데 당신에게 입술이 붙들려 그대로 멈춘다. 언제나 당신에게 닿는 것은 물그림자가 일렁이듯 설레는 일이라, 당신의 허리를 붙든 제 손을 꽉 쥔다. 우리와 타인을 가르는 건 얇디 얇은 천막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당신을 맛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얇은 커튼 하나를 두고 밖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사진 찍을래? 등의 활기찬 음성이 들리면 저도 모르게 입술이 떨어질 뻔 했으나, 너가 나를 꽉 붙들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카운트 다운이 멈췄나? 왜 사진이 안 찍히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데굴데굴 네게로 굴렸다.)
(당신의 움찔거림과 밖의 소란, 당신의 눈초리가 내리깐 제 시선에 담기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조금 흘린 것도 같다. 저도 모르게 당신과 더 붙어있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조금 부렸나보다. 우물거리던 입술을 조금 떼어냈다가,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는 동시에 찰칵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느덧 남은 것은 마지막 사진 뿐이다.) 마지막은 뭐로 할까요?
(흐응, 작은 콧소리를 내며 널 두른 팔을 풀어낸다. 그러면 여태 길게 입을 맞추고 있을 필요도 없었던건데. 물론 찰칵 소리가 나도 한참은 널 붙들고 있었을테지만.) 글쎄, 일부러 좀 찌그러지게 찍어볼까? (얼른 앞으로 더 와 봐, 하고 네 등을 살살 밀어 카메라에 두 얼굴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 두 볼 안에 바람을 넣고 더욱 가득히.)
(당신의 콧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 해본다. 속 보이는 짓에 그런 표정이라 당신이 모를 것 같자는 않았지만, 그래도. 화면 절반을 잔뜩 채운 당신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이대로 셔터를 누르고 싶기도 했지만 그 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순순히 빵빵한 당신의 뺨에 제 한 쪽 뺨을 맞대고, 다른 쪽을 부풀린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를 내며 마지막 사진이 찍혔다. 카메라 각도를 제자리에 원위치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카드로 결제를 하면 자판기가 위잉 소리를 내며 사진을 뱉는다. 하나는 당신에게 내밀고는 다른 하나를 쥐고.) ...귀엽네요.
너무 좋다. 진작 하나 찍을 걸. (이것 봐, 복어 같이 풍풍하게 불은 두 얼굴을 가리키며 꺄르르 웃는다. 작은 사진 하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제 부스에서 나올 셈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커튼을 젖히기 직전에 네 볼을 끌어다 입술을 쪽 머금는다. 여기서 나가면 사람들이 있을테니까.)
(당신이 콕 가르킨 표정을 보며 자신도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환한 미소의 당신은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당신 곁에 있을 때나 저는 가장 행복해보였다.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맞추는 사진을 보고 있을때, 휙 시선에 당신이 들어찬다. 와닿는 촉감에 홍조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무엇인지 모르기엔, 제가 매일 부비적거리는, 너무 좋아하는 당신의 입술이기에. 더욱 맞추고 싶은데. 욕심을 부리기엔 기다리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다. 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곤 이미 앞서 나간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 형한텐 장난을 못 치겠어요.
흐흐, 왜에. 복수 같은거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싶어서 한 건데. (손을 꼬옥 잡고 거대한 수조를 천천히 가로질러 걸어본다. 폐장 시간이 거의 다 되기라도 한 건지, 한적하고 광활한 공간이 주는 느낌이 정말로 바다 속에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복수라곤 안 했어요. ..아직. (싫다는 이야긴 아니었다. 보상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짖궂은 타이밍 아닌가. 당신을 잡은 손 꼼지락 거려보고.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당신의 뺨을 가볍게 훔쳐본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르고.) 고마워요. 평생 간직할 생일을 선물 받았네요.
(볼에 닿는 감촉에 살풋 눈을 감아본다. 가볍게 뜨고 널 바라보면, 푸른 물빛이 투영된 얼굴도 이렇게 따스하게 보일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앞으로의 생일도 많은데. 그 때도 곁에 있게 해줄거지?
(당신이 제게 또다른 약속을 해오면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것이, 또 다른 사슬로 우리를 묶었음을 알기 때문이겠지.) 제 생일뿐만 아니라 형 생일에도, 곁에 있을게요.
벌써 기대되네. (고개를 드밀어 코 끝을 살짝 부비고 떨어진다. 거대한 수조를 지나면 기념품 샵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게 된다. 제가 위에, 너가 한칸 아래에 서자 평소와는 반전되는 키차이다.) 오늘 본 것 중에,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당신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쩐지 현장체험학습 끝나고 선생님께서 묻는 것 같아서 조금 긴장하게 된다. 근데, 솔직히 기억나는 것은 꽃을 들고 있는 당신이나, 마리모 앞에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당신이나, 해파리 사이를 유령처럼 부유하고, 물개나 펭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좋아하는 당신이라던지, 해저터널이나 사진 부스에서 닿았던 당신의 감촉이라던지, 대형 수조 앞에서 물빛이 무색하게 얼굴을 붉히던 당신만 기억에 남는데. 한참을 생각하는지 올려다보는 시선과 다문 입은, 에스컬레이터 끝자락에 닿고나서야 움직였다. 형 생일이랑 쿠키가 가장 기억에 남았지만, 그건 제가 들은 거니까.) ...귀상어요.
(한참동안 고민하는 걸 보니 오늘 재미있었나보네, 그런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네 어깨 위에 손을 두르고 머리 위에서 머리칼을 우물거린다. 너보다 키가 크면 이런게 가능하구나.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면 널 향한 시선은 금방 다시 올라가지만.) 오, 저기 귀상어 인형도 있네. (샵 입구에 놓인 팔뚝만한 귀상어 인형을 들어보이고 네게 헤엄치듯, 우우 가까이 들이민다.) 이거 사줄까?
(당신의 행동에 방긋 웃음을 짓는다. 제 기억 속에 귀상어가 남은 건 그 탓이 아닌데도. 귀상어 인형의 볼을 잡고 주변을 가린다. 촉, 소리와 함께 귀상어 뒤에 숨은 두 머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안 물어보시길래요. 이 인형이 마음에 들어요?
(인형 뒤로 가렸던 볼은 다시 드러났을 땐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눈을 도록 굴리며 인형을 두 손으로 꾸욱 쥔다.) ...아아. 그야, 너가 귀상어 보고 귀엽다고 했던 건 기억이 났으니까. 너 좋아하면 사주려 했지.
(꾸압 눌린 상어를 본다. ...별 생각없었는데 당신의 손에 들린 걸 보니 귀엽다.) 하나 사주세요. 기념으로 집에 한 마리 데려가요.
흐흐, 좋아. (이걸 안고 잠들 너를 상상하니 너무 귀여워서. 품에 폭 안고 매장을 마저 둘러본다.) 어라, 저기 너 있어 설아. (가리키는 곳에는, 툼툼한 물개 인형이.)
(모니터 빛밖에 없는 제 방에 환한 해바라기와 어리둥절한 귀상어를 들이게 생겼다. 당신이 가르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 한 손에 얼굴이 잡혀 구겨진 인형을 잡아 품에 넣는다.) ...이건 제가 사드릴게요. 하나씩, 데려가요.
어, 진짜? 너무 좋아. 맨날 안고 자야지. (사실 저걸 품에 가득 안으면 툼툼한게 엄청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흐흐 웃으며 계산대로 향한다. 우선 귀상어 인형을 올라고 흰색 카드를 꺼낸다.) 우리 침대 이제 아쿠아리움 되겠네.
(어리둥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옆의 계산대에 섰다. 결제를 위해 핸드폰을 내밀면서도, 왜 저를 닮았는지, 왜 저걸 안고 자는지, 내내 생각하다가 결국. 아직 계산대 위에 있는 당신의 어깨에 제 얼굴을 올린다.) ...근데 왜 제가 아니라 얘를 안고 자요?
... (시선은 여전히 계산대에 고정한 채 입매가 또 한번, 아주 옅게 비틀린다.) 그야, 말랑말랑하니, 좋잖아.
(그는 원래 다른 사람을 별로 신경쓰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니 고집도 있었겠다만.) 저도 말랑말랑한데.
(이제는 입매가 약간 삐뚜름하게 말린 것이 티가 날테다. 계산을 마친 인형을 집어들고 네 손을 마저 잡았다.) 그래? 이따 밤에 한번 비교해볼까?
(당신의 입매를 보니 뭔가 당한 거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다. 냉큼 당신의 손을 잡곤.) ...어떻게 비교하는데요?
그야, 안아보면 알겠지.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어보인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소곤거리고.) 설이 너도, 말랑한 부분이 있거든.
(당신의 소근거림에 맞춰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고개를 떼낼 땐, 붉힌 제 얼굴을 잠시 가린다.) ...우리, 집에 가요.
흐흐, 그러자. (얼굴을 붉힐 때 너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면 이렇게 놀려대는 나를 너도 이해해주겠지. 서로를 위한 인형을 품에 안고, 또 서로를 손에 꼭 쥔 채로, 아쿠아리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