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설아, 우리 산책 갈까?]
[좋아요.]
[아.]
[우리 설마 진짜로 라운지 가나요?]
[너가 원하면 다른 곳 가도 돼]
[갈거면 택시 부르려고.]
[이러면 산책이 아니게 되지만...]
[그런 건 아니지만,]
[라운지에 가려면 정장을 입어야하나 싶어서요.]
[어디든 나가면 산책이죠]
[ㅎㅎ아 정장 입을 생각을 했어?]
[아냐, 그냥 편하게 입고 와도 돼.]
[사교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
[근처 주소 보내주면 타고 그리로 갈게.]
[아..]
[라운지는 처음이라서요.]
[...너무 웃진 말아요.]
[교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그냥 예쁜 바라고 생각하면 돼. :) ]
[30분 뒤에 나와.]
[...이따 뵈어요.]
(그런가. 아니 그래도. 헷갈리는지 제 머리를 뒤집은 그는 조금 일찍 교문으로 향한다. 혹여 누가 알아볼까봐, 흉과 안경을 제거한 채 옷차림은 후드에 슬랙스. 그마저도 눈의 이물감이 어색해서 주머니에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금 후에 검은 차 한 대가 네게로 접근한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면 환히 웃는 펠의 얼굴이 드러난다. 문을 열어주고 네가 탈 수 있게 옆으로 자리를 내어준다.) 설아, 못 알아볼 뻔 했어. 안경 벗은 모습은 처음이네.
(검은 차를 보고 살짝 머뭇거리다가 당신을 보고서야 몸을 싣는다.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의도한 것이 맞으니까. 그럼에도 당신은 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니까.) 선배는 알아보실 거 같아서요. ...많이 이상해요?
음... (어떤 표현이 가장 어울릴까, 고개 네게로 기울여 얼굴 들여다본다. 그러다 빙그레 웃으며 머리 짧게 쓸고 손 거둔다.) 아니, 안경 끼면 좀 더 귀여운 느낌인데 이건 색달라서. 흉터도 가린거야?
(당신이 다가오면 그렇게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서야 두 눈을 깜빡인다. 역시, 낯선 이물감 때문인가.) 네.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요. (눈짓, 손짓이 닿은 제 머리칼을 한 번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라운지 멤버십은 어쩌다 받은거에요?
미션지로 자주 보내진 곳이거든. 아예 몇날 며칠을 여기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VVIP 권한을 주더라. 일종의 단골이 된 거지. 가서 카지노 구경을 해도 좋아. (지나가는 차들을 창 너머로 훑는다. 혹시나 따라붙는 차는 없겠지. 도로를 좀 더 달리다 보면 커다란 리조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선배가 출입 가능한 카지노가 남아있어요? (담담하게 물어보면서도 창 밖 움직이는 빛들을 따라가는 손 끝에 낯선 곳에 대한 긴장과 걱정, 설렘이 동시에 묻어난다. 자연히 목이 잠겨 속삭이듯 덧붙이기를,) 같이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운 좋게도. 기관에서 뒤를 봐주기도 하거든. (긴장한걸까. 오랜만에 잠긴 네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괜찮을거라며 웃는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이어 리조트의 입구로 진입한다. 차에서 내려 너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으리으리한 그 외부만큼 화려한 로비와 리셉션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게임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카펫 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내부의 라운지로 향한다.) 처음이야, 이런 곳은?
(당신을 따라 얕게 고개를 끄덕이면, 어느새 손 끝이 휘항찬란한 입구에 닿는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안경도 없이 그대로 쏘아지는 빛이 낯설어, 당신의 곁에 바투 붙어 따라간다.) 네. 이런 곳에 발령날 일도 없고. 카지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저 같은 센티넬을 허가해줄리 없으니까요. 자주 이런 곳으로 산책을 오시나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당신에게 향하면, 조명이 담긴 제 눈도 별이 쏟아지는 당신의 것과 닮았을까.)
슬롯머신 정도는 설이도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쫓겨나려나? (장난치듯 웃으며 너를 돌아본다. 항상 아늑한 그늘만 담던 너의 눈이 조명에 반짝이는 것도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나 나나 비슷해서 말야. 나야 큰 기관을 등에 업었으니까 출입이 가능하지. 일 할 때 말고 사적인 방문은 너랑이 거의 처음이야. (라운지 입구에 서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 앞에 앉는다. 적당히 은은한 조명과 부드러운 분위기가 주변을 채운다. 앞에 놓인 메뉴판에서 음식을 직접 고를 수도 있고 또는 근처에 구비된 곳에 뷔페식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다루는 것 정도야...(말 끝이 무섭게 눈동자에 담긴 한 머신이 두번째 7을 만들고, 마지막 바퀴가 매섭게 돌아간다. 흥분한 도박꾼의 기대에도 그는 시선을 거둬 당신을 따른다. 그 사람의 운 따위보다 당신과의 시간이 훨씬 중요했으니 결과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처음. (메뉴판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 말을 곱씹는다. 늘 숨막히게 하는 말들이다. 첫신뢰. 첫배신. 첫...) 그럼 여기 디저트도 처음이겠네요. (그는 찬찬히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인 만큼 제법 고민도 길었다.) 저는, 음, 티라미수로 할래요. 선배는요?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어깨 너머 어디선가 잭팟이 터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아까 지나간 머신에 시선을 던졌던 탓일까. 아무렴 어떠할까. 지금은 무언갈 곱씹는 듯 생각에 잠긴 네 표정이 더 신경쓰인다. 왜 저는 계속 너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에 이렇게 온 신경이 쏠리게 되는지. 이건 온전히 죄책감에 의한 관심일거란 가설은 넘어선지 오래였다. 이윽고 메뉴가 정해지면 프스스 표정 풀린다.) 티라미수. 나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 설이는 단거 좋아하지? 여기 카라멜 푸딩 브레드가 그렇게 맛있대. 그것도 시켜줄게. 음료는 어떤걸로 할래? 나는 따뜻한 밀크티 시킬거야.
(요즘 당신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기는 일이 잦다. 그게 거짓이 아니라 당신이 진실로 웃는 것과 같아서. 당신에게 행운이 아니라 행복이 찾아온 것 같아서. 그게 비록 아주 사소하게 느껴져도 더 잦아지길 바라고 있었다. 당신의 물음에 고개를 냉큼 끄덕인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 저는, 그래도 저녁이니까 따듯한 카페 모카요. (보통은 아이스를 시키는 그임에도 당신을 따라 따듯한 음료를 시킨다. 음료와 디저트가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 보통 설레길 마련이지만, 어쩐지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아서. 주변을 둘러보다 역시 어색해 다시 당신에게 시선을 준다. 가장 안온한 장소니까.) 이런 곳으로 매번 발령나면 선배도 피곤했겠어요.
조금은. 내가 발령나는 곳은 항상 사람이 많으니 익숙해질 수 밖에. 많은 사람... 그러니까 변수가 생기면 그만큼 상황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되기 어렵나봐. (주변을 둘러보면 두런두런 조용한 말소리만 오가는 것이 시끄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여느 사교의 언어가 그렇듯 잔뜩 꼬인 속 뜻하며 겜블링 테이블에서 오가는 시선들이 펠에게는 그렇게도 요란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고. 모두 낯선 이들과 알 수 없는 가면들이었으나 네게로 눈길을 돌리면, 그 모든 소음은 묻혀버린다. 가면 따위는 만들지 않는 너는 이 순간만큼은 제게 한줄기 빛을 내어주는 숨구멍과도 같았다.) 설이는, 주로 재택근무처럼 실내에서 일했지?
(그는 그렇게 당신이 구르다가 모든 꼭짓점이 닳고 동그란 구가 되면,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외면당할까, 그렇게 당신이 상처 입을까 걱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단지 입을 떼기가 어려운 것은 당신과 나의 관계를 아직 정의하지 못한 탓이다. 사실 제가 당신에게 주고 싶은 값은 명확한데 당신이 제게 줄 감정이 불확실하니까, 또한 간절히 참아보는 것은 당신에게 저의 불운이 옮겨갈까봐. 제 곁을 머무르다가 힌 줌의 재가 된 가족들을 그는 아직도 끌어안고 있으니까.) 네. 저는 제 방에 있는 것이 가장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요. ...방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엔 그런 것도 있고요. (종업원이 내려놓는 디저트와 음료에 당신이 잠시 가려진다. 그러네. 그가 생각하기를, 결국 디저트와 같이 당신을 맛 볼 필요가 있다. 푸딩도 입에 넣어봐야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고, 사탕도 혀로 굴려봐야 그 달콤함을 아니까. 한결 나아진 기분에 포크를 당신에게 내민다.) ... 먼저 드세요.
(고마워, 작게 말하며 건네받은 포크를 쥐었다. 눅진하게 카라멜이 둘러진 브레드 푸딩을 한 조각 푹 떠본다.) 그러고 보니 설이 방에는 기계가 많았었지? 그러니까 그 때 폭발의 규모도... (아. 입으로 가져가려던 조각이 허공에서 잠시 멈춘다. 파편처럼 흩어져 오래토록 회수하지 못한 그 날의 감정이 얼핏 떠올라서. 무엇보다 기억 속 너의 표정이 되살아나 저를 찌르고 간 것 같아서. 그러나 표내지 않고 마저 푸딩 입으로 가져간다. 아릴 정도로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지면 모든게 마비되어 다시 괜찮아진다.) 많이 다치진 않았니? 너가 떠난 그 날 말이야.
(당신은 조각난 꽃병을 그러모으다가 찔린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짓는다. 정작 꽃병은 반짝이는 조각들로 재탄생했음에도 당신이 더 아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제가 당신을 안을 적에, 제 심장에 남은 금에 당신이 찔렸나보다.) 지금도 여전히 많아요. (포크를 들어 티라미수를 가른다. 쓴 맛. 달콤한 맛. 다시 쓴 맛. 그리고 부드러운 맛. 한 입에 넣으면 그것들의 혼재가 딱 저의 심정이겠지. 당신의 물음에 그는 결국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계획된 일이라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 제 몸의 모든 흉이 선배가 남긴 건 아니에요. (사모(詐謀)했고 사모(思慕)하는 사람아. 당신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나. 지나친 단맛이 주는 마비처럼 당시의 저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고, 당신에게 증명하기에 급급했는데.)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선배는 무사했나요?
(얼굴의 흉부터 손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는 저 흔적은 어디까지가 저가 남긴 것일까. 너를 본 순간부터 궁금하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일 것이다. 흉터의 길이에 따라 저가 네게 다가가도 되는 발걸음의 수를 결정하고 있다는 걸 너가 알게되면 어리석다는 비난을 들을까. 너에게 나라는 존재가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뱀이 네 피부 아래 새겨질 일도 없었을텐데. 이 모든 시작의 발단 또한 나비의 작은 날갯짓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정말로 저의 행운이 너를 내게로 이끈 셈이 되겠지. 내리깔린 미소와 함께 작은 푸딩 조각 하나를 떠 네 입으로 가져간다.) 너도 날 알잖아. 손 끝 하나 다친 곳 없었어
선배가 병원에 간 적 없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어요. 걱정도 됐고. (그거랑 아픈 건 별개니까. 그는 제 앞에 다가온 당신의 손을 들어올려 제 입으로 끌어당긴다. 입에 담을 때 작은 금속 소리가 들린다. 퍼지는 달콤함에 자연히 미소가 떠오른다. 여전히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은 것은, 당신이 유난히 제 흉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당신의 손에서 포크를 뺏고는 제 몸에 새긴 뱀을 감아준다. 화장으로 가렸다 한들 그 비늘의 촉감까지 사라지진 않으니까. 우선 당신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댄다.) 이런 생채기들은 훈련을 받다가 생긴 거에요. (그대로 포크를 내려놓은 손이 제 후드를 죽 잡아당긴다. 손까지 이어지는 가장 큰 흉을 당신의 손으로 더듬으며.) 이건 첫 임무 때. (그리고 다시 올려 제 목덜미에 가장 흐린 흉을 당신의 손을 덮는다.) 이거랑 허벅지에 생긴 것만 그때 파편에 긁힌 거에요. ...다른 부위에도 흉터가 있긴 한데, 그건 옷을 벗어야 해서. (그걸 여기서 하기엔 부끄러운지라 얼굴이 선홍빛으로 익었다. 보이는 곳의 뱀을 모두 당신의 손에 쥐어준 후에, 순순히 당신의 손을 놓는다. 이번엔 제가 제 앞에 놓인 케잌을 작게 떠 당신에게 내밀며.) 맛있네요. 먹어보세요.
(과연 어디까지 저를 지켜본걸까 호기심이 일던 것은 손이 잡혀 빰에 감기면 하얗게 흩어진다. 보드라운 피부 위로 재생된 피 특유의 빳빳한 감촉이 느껴지자 옅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나무의 절간 생장 과정에서 생겨난 거친 이음새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나 둘씩 흉터가 몸을 빼곡히 덮으면 넌 비로소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하는 거겠지. 선홍빛을 띠는 목덜미에 올라간 손이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 살결을 쥐어본다. 너무 컸다.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하지만 분명히 피를 흘렸을거란 생각에 안타까움 뚝뚝 묻어나는 눈을 하고 손 끝을 꼼지락거린다.) 몰랐어. 그 날 이후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난... 처음엔 너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내밀어진 케이크를 내려다보고 뒤늦게 입을 열어 물었다. 쌉싸름하다. 그리고 뒤이은 달큰함. 시선에 너를 담으니 그 모든 오묘한 오감이 한대에 뒤엉켜버린다.)
(처음엔 당신이, 나중엔 제가 달큰함과 씁쓸함을 번갈아 맛 보는 것도, 결국엔 우리가 함께 같은 그릇을 나누고 있다는 것도 당신과 저처럼 보이니 제 안의 어떠한 논리가 완전히 고장나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럼에도 고치고 싶은 감정이 들지 않는 이유 또한 잘 알았다.) 선배 뿐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믿어야했어요. 알고보니 저도 제거될 뻔 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은 그걸 알았을까. 알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정말 그렇게 됐다면 당신 또한 한 줌의 재를 마음에 담았을까. 아니면 먼지 취급을 하며 툭툭 털어냈을까. 어쩐지 대답이 두려워 입을 다물게 된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그잔을 쥐고서야 떨림을 감춘다.) 저도 몰랐어요. 선배가 정말, 그때 제게 약조하신 것처럼 모든 걸 걸고 저와 같은 곳을 봐 줄 줄은. ...정말 전부가 거짓은 아닌게 되었죠.
(라떼 위의 미세한 파동으로 시선이 향한다. 이 떨림마저 한 그릇 안이라 전해지는 건지, 마치 거짓말을 숨긴 아이처럼 저 또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가이드로부터 너의 제거 계획을 들었을 때 김 설이 아직 쓸모를 다 하지 않았다는 빌미를 대며 윗선을 찾아가 만류했었다. 그동안 쌓아온 성과가 있었으니 일개 학생의 주제넘은 발언은 어른들에게 금방 잊혀졌으나 그건 폭발과 함께 간편하게 사라져버린 너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날 너가 일으킨 거대한 폭발 덕분에, 이미 다 타버린 제 별은 더 넓어진 우주에서 새로이 탄생 할 수 있었는데. 그 별을 너는 알아챘을까. 기울어진 찻잔 너머 두 눈에 서서히 작은 반짝임 튄다.) ...언제부턴가 너가 살아있을거라 믿기 시작했어. 그래서 네 뒤를 쫓아 가보기로 한거야. 너가 걸은 길 그대로...
(별의 죽음과 탄생이 인간의 눈에 닿기란 오랜 세월이 걸린다. 아둔한 제가 당신의 변화를 깨닫기까지 너무 늦지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순간 부터 제가 살아있음을 확신했다라, 그것 또한 당신은 행운의 작용이라 믿고 있을까, 그것과 하나가 되어버린 당신을 보면 안타까움, 걱정, 공포 따위의 감정들이 먼지처럼 부옇게 올라오는 것 같아, 당신이 행운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행운이 당신에게 기생하여 연명하고 있음을, 저는 그렇게 믿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당신이 제게 증명해줄까, 그러고보면 사람 마음이란 행운이 밝혀주는 게 아닌데도, 제 마음을 투명하게 여기던 당신이 저를 쫓아왔다고 한다. 온점도 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진다. 그러니까, 우린 만날 수 밖에 없었던 거네. 하고. 바보같은 저만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거다. 그런 저를 쫓은 당신도 참 바보같아서 엉뚱하게 웃음이 났다. 덕분에 한결 편안한 낯이 되어 당신을 볼 수 있었다.) 직접 불가능이라 생각한 패에 걸어보시니 어땠어요? 그럴 가치가 있던가요
(긴장으로 굳어있던 표정은 네 미소를 눈에 담은 이후론 사르르 풀려버린다. 그러고보니 어느 순간부터. 창문 단속이 허술한 그 날 부터인가, 불안하게 주사위를 굴리던 제 습관마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날이 찾아올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건 아마 너와 지독하게 엮인 인연이며 가능성이 제 뒤를 유령처럼 쫓아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펠은 스스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된 것이리라.) 그 덕분에 너와 이렇게 함께 하니까. (기뻐, 하고 여과 없이 미소를 환히 흘려보냈다. 조금 남은 푸딩을 한 조각 입에 넣고, 마지막 조각을 큼직하게 네게 내밀었다.)
(당신이 내민 푸딩을 넙죽 입으로 받아먹는다. 몇 번 씹지 않아도 그 부드러움에 녹아 사라진다. 마치 당신의 기쁨을 씹어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내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역시 당신은 태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미소지었다고 세상이 한층 환해지고, 제가 이토록 더워할리 없으니까.) 저도 좋아요. 사실은 선배를 기다렸나봐요. (찻잔에 남은 음료를 마시며 입술을 가리곤 나직한 본심을 흘린다. 감히 꿈꿔도 되는걸까. 앞으로 당신과 이런 시간이 잦아지면 좋을텐데.) 그때 공원 산책했을 때가 생각나요. 재밌는 데이트 상대로 선배를 뽑았던 건 저랑 디저트를 잘 먹어줄 것 같아서 였거든요.
(순간의 목넘김 소리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를 기다렸다는 말은, 그러니까... 멈췄던 찻잔을 다시 기울이며 미소짓는다. 그래, 반란군의 편으로 하루 빨리 나를 영입하기 위함이겠다. 승리를 위한 부적으로 러브콜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널뛰는 상념을 잠재웠다.) 아, 그 날. (잔을 내리며 너를 바라본다.) 그런 이유였어? 보통은 더 액티비티한 요소가 들은 데이트를 기대하던데. 드디어 네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게 됐네. 너가 차온이 손을 잡고 가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짓궂은 미소를 띠며 말을 흐린다.)
(당신과 저 사이의 오차를 몰라서 미묘함을 느끼지만 바로 잡는 방법을 모른다. 이 실수가 나중의 뒤틀림으로 돌아올까. 우리라면 그럼에도 함께 있을 거라는 대책 없는 생각만 든다. 당신의 짖궂음에 손사래를 친다. 그야 그때의 그는, 귀가 붉어진다.) 저는 선배가 정말, 다른 사람이랑 잘 되려나 생각했단 말이에요. 남의 데이트를 방해할 정도로 눈치가 바닥인 건 아니고. (말할수록 함정에 걸려드는 기분인 건 왜인지. 이 주제가 제게 유리하지 않다는 건 알아서 말을 돌려본다.) 보통 어떤 액티비티함을 기대하길래요? 그럴 만한 데이트가 있나..
딱히 썸 타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작게 웃으며 덧붙인다. 평소 평이한 감정만을 비추던 얼굴 위로 당혹이 물드는게 지켜보기 즐겁다고 하면 너무 나쁜 선배일까. 하지만 그만큼 너는 제 손길과 말끝 하나하나에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귀여운 후배인 걸. 달그락,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는다.) 주로 내 능력을 백분 활용하고자 하더라고. 같은 팀으로 게임에 끌고가려 하는 사람도 있었고, 맛집이나 전시장에 가면 항상 웨이팅이 없기도 해서. 하다 못해 이런 카지노를 가서 한 몫 땡기자고 할 수도 있잖아. (주위를 향해 손짓해보였다.)
(...당신의 말을 듣고 있지만 어쩐지 김빠진다는 감상을 숨길 수 없어서. 그런 게 액티비티함이면 선배를 너무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더 멋진 걸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예를 들면 요리라던지, 그림이라던지.) 그런게 액티비티한 거면 차라리 선배에게 집에서 사탕 뜯어달라고 하는 게 더 두근거릴 거 같아요. (어쩐지 당신은 무엇이든 물건이 두 개씩 나왔을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노른자도 두 개. 사탕 봉지에 사탕도 두 개. 게임에서도 황금빛 광채가 두 개.) 혹시 그런 데이트 좋아해요? (가만. 이것도 데이트로 치나. 생각도 못한 접근에 그는 서둘러 따듯한 음료를 입에 머금는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 부름과 애정을 받는 것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담아 얘기했으나, 오히려 심드렁하게 바뀌는 목전의 낯빛을 보고 의아함 띤다. 그건 곧이어 이어진 말에 웃음과 함께 흩어졌지만.) 내 능력으로 사탕 하나 더 얻겠다는 건 너무 소소한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 부름과 애정을 받는 것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담아 얘기했으나, 오히려 심드렁하게 바뀌는 목전의 낯빛을 보고 의아함 띤다. 그건 곧이어 이어진 말에 웃음과 함께 흩어졌지만.) 내 능력으로 사탕 하나 더 얻겠다는 건 너무 소소한데. 대화의 주제와 단어의 선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건지 예상되지 않았다.) 재미있긴 해.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좋아지니까. 항상 새로운 놀라움을 안겨주고 싶고. 그런게 당연하잖아.
선배랑 같은 맛을 공유할 수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큰 욕심인데요. (당신과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라니, 저는 욕심쟁이가 맞다. 그런데도 이게 단순히 가족이 되고 싶어하는 순수한 감정이라고? 당신이 깨운 감각이 속살거리는 기분이다. 한편으론 안도한다. 제 마음을 잘 가리고 있는 것 같아서. 당신에게 예쁨 받는 착한 후배이고 싶으니까. 제 몸을 앞으로 기대며 턱을 괴자 저와 비슷한 체온이 되어버린 목걸이가 흔들린다. 제 욕심이 당신에게 재미와 놀라움을 안겨줄 것 같지만, 제가 원하는 맛이 아니란 확신이 든다.) 그럼 상대방은요? 그 사람도 선배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안겨줬나요? 그것도 당연한 거잖아요.
그건... 글쎄. (마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을 들을 것 처럼 입이 마른다. 아무래도 연애를 할 땐 제 유희보단 상대의 만족을 더 중요히 여긴 탓인지. 그래야만 상대가 제 곁에 남아있을거란 안정감 때문인지. 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시선은 달랑거리는 저의 선물에게로 꽂힌다. 프스스 웃으며 그리로 손 뻗어 그 위를 덮은 찬 금속면을 톡 건드려보고.)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나봐. ...설이는, 어떤 데이트가 좋아?
...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신을 온전히 믿을 때보다 그렇지 않은 지금 당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이. 이전엔 약속에 대해서라면 이번엔 부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애정을 많이 맛봤을 당신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적 없는 것처럼 말을 피하다니. 전 당신의 찬란한 지금만을 알기에 이 간극이 더욱 커보인다.) 저는요 집에서 하는 데이트를 선호하긴 하는데, 그냥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기만 해도 즐거울 것 같아요. 그냥 그 사람만 있어주면 돼요. (당신이 고양이처럼 제 목걸이를 치면, 제 마음도 꼬리처럼 흔들린다. 나는 당신처럼 밀고 당길 줄도 모르고, 줬다 뺐는 것도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기고 또 쥐어주는 것 밖에 없는걸. 그러니 얼마나 웃긴 일이야. 할머니는 사랑도 받아먹어 본 놈이 주는 법을 안다고, 그런 사람을 만나랬는데. 정작 제 마음은 사랑을 주는 법만 아는 사람을 향한다니.)
실내 데이트를 좋아하는구나. 왠지 그럴 것 같긴 했어. (해를 보지 못한 여린 피부와 상대에게 닿는 목소리가 유독 건조한 너를 보면 당연한 예상이다. 그저 존재 자체로도 행복한 순수한 사랑을 너는 논하고 있었다. 마치 빗물을 먹고 자란 나무가 하늘을 꿈꾸는 것처럼. 저는 뿌려주는 물 만으로도 배불리 자라 그런 것 따윈 알지도 바란 적도 없는데. 다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네 두 눈을 보고 있자면 천장이 아닌 하늘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진다.) 설이 너랑 사귀면 참 편안할 것 같아. (사르르 웃어보였다.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음... 선물을 주고 그것을 모두 되돌려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어. 상대에게 행운을 주고 싶은 내 마음은 그런 건가 봐.
(당신의 무의미한 말에 도망치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없이 붉게 익은 자신을 발견한다. 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실내를 좋아하는 것은 기민한 당신이라면 유추하기 쉬울테니. 물론, 지금 제 상태도. 야생에서 자란 나무가 고갤 들면 당연히 하늘을 우러러 볼 거라 생각하지만, 2층 창가에서 인간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화분에 시선을 주는 나무도 있다. 단지 질시도, 동정도, 동경도 아닌 애정을 담아.) 단지, 선배의 선물을 귀하게 여겨줄 이가 많기를 바랐어요.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당신의 불안이 많이 가라앉은 것도 알았다. 그저 두려운 것이다. 당신은 때가 되면 또다시 스스로를 도구처럼 행할 거니까. 아낌 없이 주는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안다. 당신은 상대를 기쁘게 하려 기꺼이 몸을 내어주겠지만. 그 나무를 마음에 품은 저와 같은 나무는 그 상실을 어찌해야하나.)
아냐, 괜찮아 정말로. (손을 설설 저으며 베시시 웃는다.) 너가 그만큼 날 생각해준다는 거니까. 이런 못난 선배라도 이렇게 아껴주는 동생 한 명이면 충분하지. (빈 잔 두개를 테이블의 곁으로 밀어두고 냅킨으로 손을 훑었다.) 이제 갈까? 라운지 밖 루프탑 풀장을 한바퀴 구경해도 좋고 아니면 겜블링을 한 번 해볼래? 카드 게임 같은 경우는 기계를 쓰지 않으니까 너에겐 페어플레이일텐데.
(그래도 당신의 웃음이 좋아, 다시금 시선이 이끌리면, 정리되어지는 테이블이 눈에 담긴다. 당신이 그렇다니 고개만 끄덕이며 디저트 나이프를 접시 위에 올려둔다. 손을 냅킨에 문지르다가 당신의 말에 웃음을 흘린다.) 카드 게임을 선배랑요? (사실 함께하면 누가 질 게 뻔한 일이긴 했다. 게다가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니 더욱이. 지는 걸 좋아하는 이는 없다. 그렇지만 당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산책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만약 선배도 같이 하신다면 할게요. 게임이든. 구경이든.
나랑 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딜러를 상대로 설이가 게임하는게 궁금해서. (설이는 똑똑하니까, 덧붙이며 흐흐 웃었다. 빌지 위에 은색 카드를 올려두면 종업원이 잠시 가져갔다가 도로 가져다놓는다. 카드를 다시 집어 주머니에 무심하게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게임은 내 카드로 하자. 너무 크게 잃을 것 같으면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할 줄 아는 게임 있어?
(당신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당신을 올려다 보았다가, 제가 누르고 있는 나이프의 끝을 본다. 거울처럼 그 기울임에 따라 당신이 보이다가 사라진다. 그가 이토록 고민하는 것은, 할 줄 아는 게임이 없어서도 아니고, 자신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럼, 평범하게 블랙잭으로 할까요. (기계 셔플도 아니고, 이런 곳에선 딜러가 자주 셔플링했다가는 손님의 원성을 사기 좋은 게임이다. 그럴 때 쓰기 좋은 기술이 있으니까, 가지고 놀던 나이프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당신을 올려다 보곤 늘 마음에 담아둔 질문을 해본다.) 선배. 저 믿으세요? (당신의 행운이 아니라, 제가 승리를 가져다 줄거라고. 믿어본 적 있으세요?)
(그 짧은 질문에 동작을 멈추고 시선 네게로 고정한다. 바람 한 점 안 부는 고요한 밤을 연상시키는 까만 눈동자다. 마치 제가 네 등에 꽂았던 칼을 빼내어 다시 건네주는 듯한 그 질문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제 손을 벨까 겁이라도 난 건지 곧장 입술이 떨어지진 않았으나 사실 그에 대한 답은 너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유능해 보였던 어린 뱀에게 승리의 확신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기로 마음 먹은 그 날부터. 블랙잭 테이블 앞에 앉는다. 섞인 카드 두 장과 베팅용 칩이 네 앞으로 다가오면 뒤로 물리기는 없다.) 설아, 널 믿지 않은 적이 없었어.
(금붕어는 작고 연약한 물고기라 많이들 착각하지만 노는 물에 따라 거대해질 수도 있는 동물이다. 당신은 저를 어디에 풀어놓았을까. 한 눈에 봐도 앳된 얼굴에 후드를 입은 아이가 플레이어 자리에 앉자 두 눈 시뻘건 플레이어들이 몰려든다. 이 자리에 앉으면 뒤로 물리기는 없다. 당신의 선언 또한 마찬가지.) 히트. 스탠드. (제스처도 사용할 줄 모르는 어린애. 꺼림칙한 알 수 없는 표정이 내내 유지된다는 점 뿐. 당신이랑 하는 것도 아닌데 두려울 것도, 지을 표정도 없었던건데. 대여섯 번의 오픈을 지나서야 이상이 두드러진다. 그는 여즉 칩의 개수를 유지 중이었다. 잃으면서, 따내면서. 옆에 앉은 당신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인다.) 게임, 언제 끝내고 싶으세요? (웃으며 건넨 물음엔 어떤 자신감도 있었다. 승리가 정해졌으니, 저는 기꺼이 당신에게 칼을 쥐어주겠다.)
(너는 과연 운이 좋은걸까, 아니면 계산 수를 철저하게 두는 걸까. 카드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주변의 탄식과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원금을 유지하는 네가 흥미로운지 옆에 기대어 앉아 알 수 없는 감정을 내비치는 차가운 안경알을 가만히 구경한다. 안정적인 플레이 스타일 마저 너와 어울렸다. 딜러의 칩이 수중에 들어오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 되어 금방 어리석은 선택에 올인을 외치는게 보통의 사람들인데. 자신감이 깃든 속삭임엔 상체 기울여 가까이 눈 맞춘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계획이 네겐 있었던걸까? 널 담은 눈에 저도 모르게 별이 자잘하게 튄다.) 오래 달렸는데. 이제 마무리 할까?
(서로에게 몸을 기울이면 둘의 거리는 얼마나 가까울까. 수학 문제처럼 보이는 이 질문의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의 별이 저를 비추니까. 우르르 제가 가진 칩을 작은 칸에 모두 밀어넣으면 주변의 술렁임이 커진다. 여태 소극적이던 그가 레이트의 최대치를 베팅했으니.) 오기의 댓가라고 해도 좋았어요. 저한테도 올인할 가치가 충분했거든요. (묻지도 않았건만, 오직 당신만 알아들을 소릴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이미 값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베팅할 적부터. 당신의 별을 목격할 적부터. 한시도 당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장난처럼 아래를 향한 손을 흔든다. 스탠드. 하트 잭과 에이스가 그의 앞에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신경도 안 썼다. 늘 그가 원하고 궁금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마비될 판단도 없었다.)
(카드가 뒤집어지기 전에 네가 낸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린다. 주변에 탄성이 터져나와도 먹먹하게 들리지 않는다. 마치 그 공간에 둘만이 있었던 것처럼. 마주한 시선이 뜨겁다. 넌 항상 저는 죽어도 볼 수 없는 값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베팅을 했다. 긴 게임에서 친구와 동료, 그리고 자신 스스로마저 잃어가며 기어코 칩 하나를 따낸걸텐데. 그럼에도 너는 그것이 모든 가치를 지닌 것처럼 이야기 한다. 올인할 가치가 충분했다고? 나의 무엇을 보고. 능력? 정? 그 모든걸 제치고 단 하나의 가능성이 두근거리며 마음을 뚫으려 했으나 저의 욕심일 뿐이라며 감히 담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제게 모든 칩은 그저 체스말 같은 소모품이었는데. 심지어 너를 포함해서까지. 그것이 운 좋게 다시 수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저는 전례없이 손 안에서 놓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렇다면 저도 결국... '블랙잭.' 딜러의 선언과 함께 테이블 위로 원금의 두배를 나타내는 고액의 칩 하나가 네 앞으로 놓인다. 깨달음과 함께 실소 같은 미소가 탁 터져나왔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어쩌면, 같은 숫자의 카드를 들고 서로 뒤집어보이기를 거부하는 걸지도 몰랐다. 일순간 주변의 테이블과 슬롯머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환호성이 들려온다. 두근거림에 저도 모르게 능력을 제어하지 못한 탓이다.) 여기서 나갈까? (너가 칩을 챙기면 딜러에게 게임 끝 사인을 보내고 도망치듯 네 손을 잡아 테이블을 벗어난다. 몰려드는 군중 사이를 헤쳐나와서야 꼬옥 쥔 손아귀의 힘이 풀린다.)
(저는 당신의 눈동자에서, 당신의 표정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의 눈에 담긴 것은 저를 날게 할 팅커벨의 요정 가루 같기도, 저를 익사시킬 은하수 같기도 하였으니. 장담하건데 현재 저는 별의 죽음과 탄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인간일테다. 별이 폭발할 적의 빛이 찬란하다. 어쩐지 무언가를 증명한 기분에 칩과 당신을 번갈아 보다 주머니에 잘 챙겨넣으면, 이곳저곳에서 샴페인이 터지고 금화가 쏟아진다.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곳 한가운데를 헤치고 나아가는 당신에게서 어떻게 시선을 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신도 이미 알지, 제가 원하는 건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다. 제 손을 잡은 당신의 손을 꾹 쥔다. 당신이 폭발하고, 다른 별을 삼키고, 새로운 별로 재탄생할 때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간의 심장에 별의 파편이 튀었다면. 당신이 직접 빼내고 보듬어줘. 그걸 위해 다시 찾아올 당신이 길을 헤메지 않도록, 저는 늘 마음의 문을 열어둘테니까.)...(행운의 여파가 닿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곳에 도착하고 나면 그제서야 할딱이는 숨을 정리한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놀라워서 무슨 말을 꺼내볼까 입술을 달싹이다가 당신을 기다리기로 한다. 혹시나. 혹여나.)
(겜블링 테이블을 벗어나 둘이 도착한 곳은 라운지의 테라스였다. 화려한 행운의 소음을 듣고 너도나도 쫓아나간 사람들로 인해 둘은 빈 공간에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탁 트인 야경이 대리석 난간 너머로 찬란히 빛났고 보름달이 뜬 까만 하늘에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은 너를 인파 속에서 놓칠 일이 없는데도 여즉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이유는, 확인 할 것이 있어서였다.) 설아. (가쁜 숨소리와 마른 목소리가 밤공기에 섞인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 하면 좋을까. 바람결에 흔들리는 네 머리로 눈이 향한다. 천천히 다가가 손으로 그 결을 넘겨주고 너와 눈을 맞추면, 찬란하게 반짝이는 저만의 무수한 별이 비춰진다.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너와 함께 있으며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마다 매번 내 눈이 이렇게도 빛이 났었다는걸. 포커페이스가 무의미했을 깨닫자 무너지듯 펠의 두 볼 위로 옅은 홍조가 인다. 함께 옥상을 그을리던 해를 쬐던 그 날에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지. 벼랑 끝까지 몰려서 까마득한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느낌. 그 때 우린 베팅을 모두 마쳤으니 이제는 카드를 뒤집어야 할 차례였다. 여태 많은 도박을 우습게 이겨왔으나 지금만큼 제 능력이 간절했던 순간은 없었으리라. 설레임, 두려움. 그 모든게 섞여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강박적으로 주사위를 굴려대던 습관처럼 네 손을 쥔 수지가 연신 움직인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너도 알다싶이, 우리의 첫 만남은 불신에서 피어났지. 나는 너무 어리석었고. 아직까지도 난 그 일을 깊이 후회 해. 때로는 그 시간을 다시 쓰고 싶다고 간절히 빌었어. 네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는데도, 그런데도 너는... 날 받아줬지. (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바보 같이 번졌다.) 네게 영원히 곁에서 믿음을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난 정말 죽음을 각오했어. 알고 있었니? 난 너로 인해서 새로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자 난간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조명에 아른거리는 네 얼굴이 제 시야에서 벗어날까 두려워 볼에 손을 얹었다.) 여지껏 나는 승패를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근데도 너랑 나, 우리 둘은 이길 수 없는 내기를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지금 드는 생각은, 그 직감이 틀리지 않은 이유는... (너와 내가. 너도 나만큼. 두 눈에서 느껴지는 타오르는 고통에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땐다.) ...설아. 너는 나를 믿어?
(온갖 사람들의 소리와 음악 소리, 기계음으로부터 벗어나 테라스로 나오면 마치 세상으로 부터 도망친 기분이 든다. 바람이 살살 제 볼을 간지럽히고 당신이 제 이름을 부르면, 백일몽에서 깨어난다. 제발 깨우지 말아달라고 빌어볼 새도 없이 당신의 손짓이 저를 깨운다. 나. 이 손짓을 기억하고 있는데. 당신이 제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정히 이야기했던 것을 한시도 잊지 못했는데. 당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건 그런 이유도 있나보다. 손짓도, 미소도 전부 거짓인 당신의 눈만큼은 늘 진실이 담겼으니까. 당신이 쏟아내는 회고를, 고해를, 해소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그 심정을 뭐라 이름 붙혀야하나. 저를 주사위 굴리듯한 행동도. 당신이 주는 이런 무지도 너무나 낯이 익다. 저번 생의 일만큼 아득하나 마치 오늘 일처럼 생생했다.) 아뇨. 저는... 선배 안 믿어요. (그 대답을 듣고 당신이 도망칠까 서둘러 당신의 허리에 제 손을 감는다. 옷에 구김이 가도록 꽉 쥔 손이 달달 떨리면, 기어코 터져나온 감정이 당신의 손을 적시고 만다. 이토록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것도 처음이라서, 드디어 저를 붙잡는 당신의 손에 제 볼을 비빈다.) 그런데, 용서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제 삶에서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은 선배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모두, 그냥 그렇게 떠나버렸는데. 영원히 제 곁에 있어주겠다는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미워해요? 저는, 선배가 너무, 간절했는데. (제가 믿는다면, 그들과 같이 당신도 떠날거야? 당신의 대답이 그렇다고 할까봐, 당신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긍정할까봐 저는 못한다. 당신의 손을 놓아버리고 볼을 감싸는 것은 저 역시 당신의 시선을 전부 갖고 싶기에. 저는 당신의 행운도, 당신도 불신하여, 카드 같은 거 뒤집지 말자고 빌고 싶었다. 만약에라도 다른 게 나오면 어떡해. 나는 그런 거 싫어. 이제 제겐 신뢰가 전부 소진되어서. 그래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인데. 그러니 여태 성사되지 못한 내기처럼 그냥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이야기해줬으면. 목이 잠겨 흡사 속삭임과 같은 애원이 쏟아나온다.) 안 믿을래요. 그런 거 싫어요. 제발. 전 선배를,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상하잖아. 신뢰는 줄 수 없고 사랑은 줄 수 있다니. 당신이 저를 승낙하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서, 그 찰나를 미루고자 눈을 꾹 감고 당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누른다. 오래도록 물에 잠겨있던 이가 간신히 빠져나와 숨을 쉬듯. 가물은 땅이 허겁지겁 빗물을 마시듯.)
(불신을 고백하는 너의 몇 마디 말과, 손을 적시는 눈물에 그만 얼어붙었던 것 같다. 그리곤 그대로 네 손에 붙들려 하염없이 울음을 토하는 속삭임이 제 마음을 찢어놓도록 놔둘 수 밖엔. 이토록 매마른 목소리를 분명 기억한다. 너의 목소리를 처음 귀에 새긴 그날도 이렇게 잠겨 있었는데, 처음부터 넌 무표정한 유리알 뒤로 이런 우는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뒤이어 사랑한다는 말이 꿈결처럼 들려오자 사고는 음악처럼 뚝 끊겨버린다.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벌어진 입술로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포개어진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질주했다. 너가 나에게 입을 맞췄구나. 허리를 아프게 죄어오는 팔 마저도, 입에서 느껴지는 눈물의 짠 맛도 모두 꿈만 같아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져서. 손에 쥐인 볼을 당겨 고개를 틀고 입술을 깊이 물어당겼다. 한번. 또 한번 더. 순의 여린 점막이 서로 부벼지고 미끄러지다가 젖은 소음과 떨어지면 둘 사이로 잘게 떨리는 숨이 신음처럼 흩어진다. 한 때 카지노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승리는 무엇일지 철 없이 상상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어쩌면 아름다운 명예나 거액의 돈 따위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손에 넣은 듯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우리의 기나긴 게임의 끝을 알리는 버져가 울린다. 펑, 테라스 곁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알록달록한 불꽃이 연이어 터진다.) 너를 따라서 뛰어내린 보람이 있었어. (들렸을지 모를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사라진다. 입가엔 하늘만큼 찬란한 미소를 띄우고. 이번엔 폭발음의 소음을 뚫고 네게 정확히 정해질 만큼 네게 말한다.) 앞으로도 쭉 믿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내 곁에 있어줘. 나도... 나도 널 사랑하니까. 설아.
(당신이 저를 밀어내지 못할 걸 알아서 훔친 입술이지만, 못된 짓이라는 것도 알았다. 단지 그는 그만큼 간절하고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당신이 밀어내면 밀려나는 것은 자신이니까. 당신의 거절이 뭉개지도록 강하게 문지른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내면 당신이 제 볼을 당긴다. 당신의 손길은 제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나, 흔쾌히 품을 오산이었으니 그 놀라움에 푹 젖은 속눈썹을 들어올린다. 이능. 감정. 하물며 욕망까지 자제가 되지 않아 건물 전체 모니터나 전등 따위가 깜빡거린다. 그리하면 제 그림자가 당신에게 잔뜩 드리운 것이, 그걸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어. 게다가 믿기지 않겠지만, 당신이 저를 어여뻐하는 것이 느껴지니, 갈급하는 몸을 당신에게 바짝 붙인다. 타들어가던 제 입술을 당신이 한 입 물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져 오싹함이 저를 타고 흐른다. 당신을 조이던 팔에 힘을 풀어 허리를 받치고, 볼을 감싸던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뒷목을 단단히 감싼다. 그리하면 당신의 고개를 뺄 수 없으니까. 당신이 피어낸 불꽃의 색으로 가득 물든 뺨이 좋았다. 단 것을 처음 맛본 짐승새끼마냥 입술을 부비적거리며 들이밀면 미끄러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것마저도 고백처럼 들리지만.) 죽을 때까지요. 정말, 사랑해요. 선배. (여름의 습한 공기를 닮아 끈적이는 숨을 가쁘게 고르고서야 명료한 대답을 전한다. 불꽃 탓인가, 유난히 반짝이는 입술로 욕망을 숨기지도 못하고.) 저, 선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게 좋아요. (보란 듯 제 이름을 발음 해보면 당신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워진다. 장난처럼 몇 번이나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겹쳤을까. 깊어진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당신을 탐하면 시럽과도 같이 지독한 단 맛이 저를 휩쓴다. 너무 달아서, 영원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당신의 입술을 빨면 낯 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아, 너의 사랑한다는 고백엔 가슴이 또 한번 하염없이 달리게 된다.) 설아. 이렇게? (속살거리며 널 올려다본다. 베시시 웃는 얼굴엔 옅은 흥분이 색깔로 드러나 있었다. 이어 연신 다가오는 입술과 부딪힌다. 두어번에서 끝날 줄로만 알았던 입맞춤이 어리광처럼 끝없이 이어는게, 꼭 너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아 가슴 속 무언가가 움트듯 간질거렸다. 이런게 정말 사랑이라면 예쁜 곳에 담아서 끝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너와 젖은 살이 부비는 것이 너무나도 그 이상을 갈구하게 해 무서워졌다. 교활한 저는 전에도 순진한 널 한 입에 삼켰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네게 이빨 자국을 낼까봐. 고개를 뒤로 살짝 물렸으나 뒷목을 단단히 붙든 손에 의해 두 상체가 난간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 기울어진다. 그로 인해 네게 더욱 매달린 채 간신히 입술을 때면, 마음을 꾹 눌러두는 듯한 눅눅한 한숨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주체하지 못하는 두근거림을 두 볼에 드러낸 채. 그 시선을 깨뜨린건 펠의 바지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아. 사감...인 것 같은데.
(연신 입술을 부딪쳐오는 것이 자신을 더욱 불러달라는 듯, 아껴달라는 듯, 그리고 사랑해달라는 듯 애틋하기도 하다. 그야 말로 하기엔 너무 부끄러우나 오래도록 억누른 감정이 물꼬를 텄으니, 표현한 길이 입맞춤밖에 없었다. 기어코 당신이 저를 떼어내면 저는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당신에게 보이기엔 너무 못된 마음이라 몸을 잔뜩 웅크리게 된다. 달뜬 숨을 목덜미에 뱉으며 제 얼굴을 문지른다.) 받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진실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당신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한창 사냥을 한 것 마냥 심장이 쿵쿵 뛰고 흥분이 붉게 도는데. 그리 할 수 있는 그가 당신의 전화를 꺼버리지 않는 것은,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어코 세상이 도망친 우리를 잡으러 왔다는 것을. 그것은 우릴 잔혹한 현실로 끌어내린다. 정말, 마지막으로. 당신의 목에 제 젖은 입술을 짧게 부빈 그는 고개를 들어 당신을 살핀다. 지분거리는 손짓으로 당신의 머리를 정리하고 눈을 잘 가려주며.) 받으셔야 해요. 의심 받으시면 곤란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