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
(모든 것을 불신하게 된 이후로 피어난 강박은, 당신이 그 장소를 떠난 이후로도 저를 붙들어 놓았다. 감시실에 잠입해 모든 cctv를 조작하고 나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그가 간과한 것은 그가 기계의 눈을 돌릴 순 있어도,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하.
(귀가하자마자 보는 꼬라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서둘러 왔을 것을. 붉게 물들어 깜빡이는 두어개의 모니터. 우습게도 상대 능력자가 시원찮은 모양인지, 제가 세워둔 방화벽이 휼륭한 것인지, 모든 게 위험하진 않았으나, 가장 중요한 모니터가 피처럼 물들어 있었다.깜찍하게도 당신의 선물이 열린 모양이다. 제가 알기론 당신에겐 이런 능력이 없는데. 가이딩 약을 씹어삼키며 연장을 챙긴다.)
간부님. 우리 정보원이 잡혀간 모양입니다. 구출 후 신호 보낼 테니 지원병력 대기 시켜주세요. 예. 해당 거처는 정리하겠습니다.
(늘 구조는 시도해왔다. 저와 같은 성공사례가 드물 뿐이었다. 당신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사례일 뿐이다. 능력이나 약속 따위보다. 단지 당신이라서. 목적지에 도착한 그의 뒤로 오버클럭되어 김이 나는 오토바이가 까만 스키드 마크를 그린다. 대강 던져둔 채 내리면 정부 실험실 앞에 있는 자신이다. 여길 자처해서 오게 될 줄이야. 당신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 상세하게 떠오르는 것이. 스스로의 트라우마와 엉켜서. 머리 속이 부옇다. 늘상 하던 제 수치 계산이, 뚝뚝 끊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출전하라며 불려나간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보통 전투에 승리의 행운을 부여하기 위해 저가 출전하게 되면 안정 거리를 지켜서 최전선보다 한참 뒤에 배치 받았으나, 오늘은 유독 싸늘하게 눈을 치켜뜬 간부에게 등이 떠밀려 펠은 최전방 끝까지로 불려나가 엄호도 없이 총알 사이를 피해야 했다. 현장 경험이 크게 차이 나는 성인 센티넬과 군부대 무리 사이에 섞인 그가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하여도 몸을 온전히 건사 하기엔 무리였으며, 더군다나 어제밤 귀가 후 가이딩을 받지 못한 그대로 출전한 탓인지 손 안에 구르는 주사위는 계속해서 제 예상을 배신하고 있었다. 가이딩이 필요하다며 아무리 뒤를 향해 지원 요청을 해도 들리지 않는 양 인이어로의 응답은 없었다. 이상할 일이다. 어쩐지 이번 임무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꺼림칙했는데. 상대편의 공격으로 군데군데 피부가 찢어지고 멍이 드는 와중에 부대원을 향해 폭격이 한 차례 쏟아진다. 그것들이 모두 빗나가도록 행운을 불어넣고나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만약에 제가 그 순간 눈을 비비지 않고 졸음을 참았더라면, 뒤에서 몰래 다가오는 손을 알아챘을까. 달그락. 평소라면 금방 고장났을 구속구가 제 손목을 아프게 했다. 전투에서 흘린 피가 말라붙어 온 몸 곳곳이 따가웠고, 갈빗대가 부딪혔는지 숨이 자꾸만 뚝뚝 끊어졌다. 칙칙한 회색 벽을 흐린 시야로 훑어봤자 유일한 탈출구로 보이는 문을 굳게 닫혔을 뿐더라 움직일 수 없는 제게 너무 멀었다. 적군에게 잡혀온걸까? 가설이 무색하게도 저는 이 장소를 너무나도 잘 기억했다. 벽에 그려진 정부군의 마크를 보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주사위를 수여받은 곳. 이 곳은 저가 아프게 성장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곳이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덜컹 열리고 곧이어 익숙한 얼굴이 여럿 들어온다.
"안녕 펠릭스. 몸은 좀 어때. 가이딩 안 해준다고 삐진거 아니지?"
아아. 이어지는 웃음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기분이 나빴다.)
(어지러워. 저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벼랑 끝에서 위태로운 춤을 추고 있었다. 별 게 도박인가. 확실한 확률 아래에서나 베팅했던 저였으나 이번 행위는 계산 따위를 집어치워 요행을 바란 노름이나 다름 없었다. 허나 말릴 이도, 말릴 수 있는 이도 없었다. 제 사람, 제 사랑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제 의지를 잃는다는 것의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허나 그때와 다르게, 제겐 용기도 힘도, 있었다. 모두 당신이 일깨워준 것이었는데. 정작 당신은 제 곁이 아닌 저 안에 있댄다. 그 점이 저를 미치게 했다.)
펠. 아, 그래. 펠릭스가 가지고 있던 주사위. 내놔요.
(당신이 알려준 적도 없는 당신의 가짜 풀네임을 친절하게 입에 담으며 사지가 묶인 상대의 입에 총구를 쑤셔넣는다. 당신의 위치는 이미 알았다. 단지 돌려받을 건 그것 뿐만이 아니라서. 묻는 제 어깨 너머엔 꺽꺽대며 전선에 휘감긴 상대의 동료가 고요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이나, 이미 죽은 이에게 깊이 박힌 감정은 적확했다. 공포. 또는 몰이해. 알약을 생으로 씹는 현재의 제겐 그것이 외려 몰이해였다. 기계를 조작할 수 있으면 그 일부도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한 것은 같은 기계 조작 계열의 상대였으며, 상대 진영이 전부 방조했다. 그것들이 돌아올 것이라 왜 생각치 못하는가? 와중에 상대의 연륜도 헛것은 아닌지 사지에 감긴 부품들이 풀리고 감기기를 반복했다. 예전보다 저항이 약한데.)
지원 요청할 생각 말고. 당신이 망가뜨려서 번거롭게 처리해야하잖아요.
(짜증나. 벼랑에 몰리자 예민한 성질을 감출 겨를도 없어 머릴 뒤집는다. 뒤에선 몸뚱아리들이 질질 끌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지직거리면 상대의 눈에 희망이 보였다가 꺼진다. 그야 모니터 안의 그 장소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니, 누구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상대가 마지막으로 발악한다. 펠릭스의 함정이라 생각해본 적 없냐고. 하긴, 당신에게 총은 과도한 자비다. 뱀처럼 상대 목을 타고오른 기계가 천천히 그것을 비튼다.)
그 사람, 날 사랑한대. 게다가, 난 그를 용서했는데. 그게 얼마나, 무거운 구속이 되는지, 받아 본 적 없는 당신은 모르겠지.
(쓸 데 없이 명을 재촉하기는. 으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 볼에 튄 피나 문질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대가 손에 쥐고 있던 부품들이 재조립되면, 멀쩡히 작동하는 주사위가 살아서 제 손으로 돌아왔다. 애써 정신차리고 보면 유리 너머에 당신이 보인다.)
("난 아직도 너가 전투 직후에 가이딩이 없으면 이깟 장난감 아나 못 푸는게 신기해. 나야 뭐 매번 편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큭. 정말 행운 주머니라도 동난 것 같지 않아?"
이거 보셔요, 조롱의 미소를 그린 붉은 머리의 여자가 곁에 선 중년의 남자에게 고갯짓하며 피가 말라붙은 펠의 허벅다리를 발로 꾸욱 짓밟는다. 눈 앞이 벌개지는 고통에 숨을 푹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인다. 입술이 허옇게 질린 채 몸이 벌벌 떨렸으나,
"...하, 그래도 소리 하나 안 내지. 버릇 어디 안 가네."
재미 없다며 그녀의 발이 툭 떨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착하게 간부를 올려다본다. 여지껏 꼬리가 밟혔다는 느낌은 든 적이 없었으니까, 이미 패배가 명백한 패를 뒤집어보이기를 거부한다.)
선생님... 대체 왜 이러시는거에요. 뭔가 오해하고 계신게 분명합니다. 우선 이것부터 풀고 얘기해요.
(담담한 음성을 끝으로 방 안이 고요해진다. 싸늘할 정도로. 아. 순간 눈 앞이 번쩍이더니 고개가 돌아간다. 뒤이어 우측 볼에 불 같이 뜨거운 고통이 퍼지고. 누구에게 뺨을 맞은 건 처음이라 심장이 벌렁이는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그 상대가 저를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듯 뒤를 봐준 담당 관장이라는 것에 당황하여 금방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탑이 무너진다.
"배은망덕한 놈. 여태 우리가 돌봐준 은혜도 모르고, 쥐새끼 같이 우리를 속이려 들지. 너는 내가 우스웠을거야. 그치?"
남자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뚝뚝 흘러떨어진다. 그가 무릎을 굽혀 발치의 저와 눈높이를 맞추면, 이미 애정이나 연민 따위는 증발해버린 벌건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네 놈이 뱀과 소통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었어. 계속 정보가 새는 구멍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정말로 네 이름을 끼워넣으니 모든게 설명이 되더구나. 펠릭스.., 왜 그랬어."
게임 오버를 알리는 경고음이 머리 속에 울린다. 서서히 차오르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왼손의 끄트머리가 쿡쿡 쑤시기 시작한다.
"너를 다시 우리쪽으로 회유시키는게 성공 할거란 기대는 없다. 넌 우리에게 충성스러웠던 것 만큼 그 쪽에게도 그럴테니까. 그래도 조커 카드를 상대편에게 넘겨줄 바엔, 차라리 없애버리는게 낫지."
남자가 도로 일어서서 등을 돌리기 전, 여자에게 간단하게 지시하고 방을 걸어나간다.
"베키, 죽이든 말든 상관 없으니까 쓸만한 정보 하나만 캐고 나와. 능력 억제제를 맞췄으니 네게 해는 못 가할거다."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기대에 찬 음습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제 위로 드리운다.)
(관장이라는 남자가 복도를 걸으며 이상함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치게 조용하고, 어두웠다.
“이 시간이라도 그렇지. 정전이라도 났나.”
사내가 그리 읊조리며 스위치를 찾느라 벽을 더듬거리면 무언가가 그의 뺨을 거세게 때린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을 다 뺏긴 채 이미 사지가 굳어 기계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를 살피기 위해 움직이자, 관장의 오른 볼을 터트린 기계 부품이 발에 채였다. 저는 이런 새끼랑 있고, 정작 베키라는 여자가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당신이 그랬다면서요. 당신에게 해를 못 가할 거라고.
(조립되는 소리와 나직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당신을 제 품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자칫하면 인질이 될 것 같았다. 와중에 남자의 지시가 우습지도 않아서, 같은 고통을 받았으면 했다. 둘의 거리가 적당히 떨어질 때까지.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관장이 뭐라 이야기 해보지만, 솔직히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워, 그의 구각에 피가 날 정도로 부품을 조인다. 건너편의 당신을 한없이 어루만져도 유리의 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척 싫어서, 잠시 정신이 흐트러지면 당신이 있는 곳의 전등이 깜빡거린다.)
형이 엉망이 될 때마다 같은 짓을 해볼까봐요. 당신에게.
(마음 속으로 시간을 세고 있었다. 당신이 위험해지기 전에 구해야했으므로, 관장의 상태도 살펴야 했다. 그의 조바심을 보여주듯 주사위가 해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기를 반복한다. 당신은 늘 저를 기다리게 했고, 저는 기꺼이 기다려왔으나. 이번만큼 힘겨운 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같은 몇 분간, 얼마나 많은 질문 세례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반란군의 다음 움직임이나, 함께 내통하던 정보원의 정체, 저를 반란군으로 처음 꾀어낸 이의 이름 등을 요구하는 질문이 들리면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입술은 호선만을 그리며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걸 이미 예상한 베키는 화를 내는 대신 물은 수고를 들이게 한 죄로 제게 가해지는 발길질에 점차 힘을 넣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갈비가 부러진 것 같아. 아니면 코에서 흐르는 피 때문인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자세를 바꿔보려 바닥으로 고꾸라진 상체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려. 졸리다. 너가 보고싶었다. 둘 위를 비춘 전등이 깜박거릴 적엔 자연히 네가 떠올라서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너한테 연락하기로 했었는데. 너가 기다리고 있는데. 또 내가 널 실망시키는 걸까. 배신의 고통에 찬 너의 눈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눈 앞에 아득하게 장막이 드리우려던 것은, 베키의 말에 말끔히 거둬지게 된다.
"펠릭스으, 소문 다 들었어. 너 남자친구 생겼다며."
그녀의 키득거림이 더욱 커진다.
"같이 데이트 한거 다 들었어. 이런 일은 나한테 먼저 말해줬어야 하는거 아니냐? 서운해. 어떤 앤데 그래? 막 뿅가? 뭐, 나만큼 좆도 잘 빨아주던?"
그녀의 상스러운 입에 기어코 네가 올라간다. 그것이 미치도록 싫어서, 여태 고수하던 평정을 흩트리게 된다. 숨을 조금씩 가쁘게 쉬며 꿈틀거리는 모습을 알아보곤 그녀가 입이 째지게 웃어댄다.
"하지마? 이번에는 진짜 소중한가보네? 크흐, 이를 어째.우리 펠릭스가 사랑에 빠졌대요."
노래를 부르며 조롱하는 음성이 제 위로 점점 가까워지더니 목에 컥, 하고 압박이 가해진다. 그녀의 무릎에 목을 짓눌린 상태에서 두 손목이 모여잡혀 머리 위로 고정된다.
"그래봤자 또 네 행운을 노리고 접근한 놈인게 뻔하지. 너 버린 부모가 돈달라고 학교에 개 같이 쫓아온 것 처럼, 걔도 돈 냄새 맡고 살랑살랑 붙은거 아냐?"
메아리처럼 웃음소리가 들렸다.)
... 아냐... 걘, 나를 사랑,한댔어.
(쉬고 갈라진 목에서 버석한 목소리가 간신히 비집고 나온다. 그것이 보기 즐거운지 베키는 가벼운 몸짓으로 허리춤에서 잭나이프 하나를 꺼내어든다. 반짝이는 날이 제 머리 위를 지나 손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야, 답 나왔네. 너가 이렇게 애틋하게 아낄 놈이면 온 시간 같이 붙어있었을건데, 걜 잡아 물으면 해결되겠다. 누구야. 이름 불자. 자, 하나~"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무어라 부정하기도 전에 예리한 칼날이 오른 손에, 너와 나의 반지가 위치한 그 곳을 찢는 것이 느껴진다. 비명은 눌린 목 아래에 막혀서 올라오지 못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칼에 닿음과 동시에 뱀처럼 기어온 전선이 베키의 목을 낚아챈다. 제가 손짓을 하면 마치 강제로 묶인 짐승 마냥 거칠게 구석으로 끌려간다. 그녀가 몸을 숙인 덕에 가능했지만, 고맙지는 않았다.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 당신을 살피면, 이미 너무 많은 피가, 당신의 호흡이. 속박에서 풀려난 당신을 조심스레 눕히는 손이 달달 떨렸다.)
선배. 저 알아보시겠어요? 눈 감으시면 절대 안돼요. 알잖아요.
(미리 찾아둔 응급상자를 뒤지며 당신을 급히 처치한다. 오죽하면 이런 교육을 해둔 학교에게 일말의 감사를 느낄 정도로. 과부하 된 제가 뜨거운 건 고려하지도 못한 채, 당신이 지나치게 차가운 것 같아서, 끊임없이 볼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당신이 완전히 저버릴 것 같아, 그런 공포감에 휩싸일 때, 절그렁, 소리를 내며 베키의 손에서 잭나이프가 떨어진다. 아 맞아, 네가 있었지. 아직 죽진 않았다. 단지 꺽꺽 대며 제 목을 조인 것을 긁어내고 있었다. 복에 겨운 당신은 모든 손가락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기계 부품 따위가 통 채로 그녀의 몸에 달라붙는다. 산 채로 뱀에게 몸이 조이는 감각은 어떨까. 산 채로 온 몸이 부숴지는 감각은? 뱀의 사냥은 길면 45분까지도 지속된다던데. 그녀의 행운이 그만큼 길기를 바랐다. 그녀의 평온한 죽음을 유예하기 위해 목줄을 풀어주는 대신 재갈을 단단히 물린다. 지금 당신의 귀에 들어가는 목소리는 저만 해도 충분했기에. 제 몸으로 그 모습을 당신으로부터 숨기고 머리를 연신 쓸어 넘겨준다.)
선배. 곧 지원군이 올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더 빠르게, 올 수 있었는데. …사랑해요. 제발. 떠나지 말아요. 네?
(이 말을 하면, 입술을 맞추면, 당신마저 저를 떠날까 봐 망설이게 된다. 이 세상은 제가 사랑한 모든 이들을 무참히 앗아갔기에 거짓말쟁이. 나와 영원히 있어주겠다며, 약속했으면서. 이런 당신을 제가 어떻게 믿어. 눈을 떼면 이토록 망가져선 저를 떠날 것 같은 당신을. 쉼 없이 당신에게 말을 걸면서도 당신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살아만 있어준다면, 그걸로 족했다. 멀리서 사람들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린다. 아군이다. 당신이 들 것에 실려 나가고서야 맥이 풀려 동료의 부축을 받는다. 지금부터 빌어볼 구석은 당신의 행운과 신 뿐이라는 것이 비참했다.)
(그깟 새끼손가락 하나가 뭐라고 지난 날의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몸이 경련하듯 떨리는게 웃기지. 영원처럼 느껴지던 고통은 갑자기 베키가 시야에서 벗어나며 끊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다른 아닌 그토록 꿈 꿔온...너였다. 김 설? 너가 여기에 있을리가 없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바람에 내가 깜빡 잠에 든걸까. 바닥에 눕혀지니 머리가 하늘에 붕 뜬 꿈결 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게 환영이고 거짓말이라 해도, 그래도 너무 기뻤다. 바보 같이 허연 입꼬리를 당겨올린다. 어떻게 눈을 감겠어. 이렇게 군데군데 찢어지고 긁혀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보이는 너를 남겨두고. 찐득하게 말라붙은 앞머리가 거둬지자 드러난 조명이 제 시야를 더욱 부옇게 흐린다. 설아. 너 왜 표정이 그래. 지금의 나는 못나보여? 꼬질꼬질하고 능력 없다고, 나 미워하는거 아니지? 그래도 난 네 복이잖아. 복을 미워할 순 없는 거잖아. 따스한 손이 너덜너덜해진 몸 곳곳을 누르며 지혈하는 와중에 지리멸렬한 생각이 두서 없이 이어진다. 이건 아마도 저기 벽 속에 구겨진 여자가 제게 심어놓고 간 불안이겠다. 미안해. 나는 이런 곳에서 자라와서 아마 끝도 이 곳에서 맺게 되겠지. 용서로 선물받은 너의 품이 내겐 너무 과분한 자리였나봐. 그래도 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기로 한 약속은 지켰으니까... 그렇게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그치? 쿵쿵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울리던 심박이 점점 느려지더니 곧 멈출 것 처럼 속도가 줄었다. 너의 모든 말이 물 속의 웅얼임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순간,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너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하면, 역시 너무 운이 좋다며 신이 이의를 들까. 나의 행운은 결국 모두 네게 달려 있었구나. 마지막 키스처럼 다가온 입술은 제게 생명의 키스가 되어 손 끝에 온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렇게 간신히 얻은 힘으로 목소리를 짜내면,)
...나도.
(실려나가기 전에 네게 무어라 더 말했던 것 같은데. 충분히 전해졌을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병원 같은 곳에 눕혀져 치료를 받고,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시간을 얼마나 흘려보냈을지. 늦은 오후의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볼을 간질인다. 그 느낌에 눈꺼풀을 떨다가 스르르 떠보면, 누군가가 곁에 앉아있었다. 설이 너인가? 머리는 곧장 그쪽으로 향했으나 실루엣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도 너가 아닌 타인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 기관 내 가이드 같았다.)
(동료에게 기대서도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의 입모양을 읽은 건 그 덕분이겠지. 화답은 바라지도 않았건만, 당신이 뱉은 한 어절조차 제겐 희망이 되고 복이 되니. 너절한 몸뚱아리를 비척거리며 일으켜세운다. 그것이 저승이든 이승이든당신의 곁으로 가고 싶다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정보, 빼드릴게요. 만약 쓰러지면, 같은 곳으로 보내줘요. 그냥.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제 발로 걸어온 그는 그제야 바로 옆 병실에서 가이딩을 받고 있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과 약물 남용으로 인해 점막 가이딩이 필수라나. 제 입술 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진 손가락 너머 가이드의 입술을 멀뚱히 보고있자 가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재촉한다. 너도 빨리 그 사람한테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냐며, 니가 우겨서 가이드 전용 병실이 아니라 여기서 하고 있는 건데, 이 쪽이 제일 속도가 빠르다고. 마치 입에 쓴 약을 입에 문 것마냥 손가락을 물은 얼굴이 사뭇 찡그려진다. 가이딩 직전 치료를 받으며 보고도 하느라 옆을 지켜보던 간부가 기가 차 헛웃음을 뱉는다. 저런 애가 정부 부속 비밀 실험실 하나를 아작을 냈다니. 수습은 물론이거니와 정보 수집을 위해 제 지부가 뒤집어졌다. 그나마 제법 높아보이는 남자 하나, 그 남자의 심복 하나를 살려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크게 지탄받을 뻔 했다. 더군다나 구출해온 이가, 팩스 출신 유명인이다. 간부들 사이에도 공유된 아주 유명한 정부의 총알받이이자, 변수라니.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게 저 뚱한 표정의, 병원복이 커보일 정도로 어린 학생이란다. . 아무리 목숨을 걸고 한 짓이라지만, 기가 차서 다시금 한숨을 쉰다. 왜, 그러지, 제 딴엔 잘못한 것도 찔리는 것도 없지만 자꾸 한숨을 내쉬는 듯한 간부의 입술을 보게 된다. 분명 시키는 대로 임시 거처도 전부 정리했고 납치된 당신도 구해왔고, 정보 빼오는 김에 증거도 잊지않고 말살했다. 그 과정에 과한 진압이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하지말라는 이야기도 없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눈빛이 투명해서 간부가 참다참다 입을 떼자 한 가이드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온다. 당신의 곁을 지키던 가이드다.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났나, 손가락을 뱉곤 링겔을 뽑아내려다가 어깨를 붙잡힌다. 가이드가 링거줄을 제거하고 지혈할 솜을 찾는 그 새에 방을 박차고 나간다. 피가 손목을 타고 흐르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뛰쳐가 1인실 문을 밀어제낀다. 당신과 비로소 눈이 마주치면, 세상의 소리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유일한 당신이 없어질 뻔 했다. 영원히 소리와 언어를 잃어버릴 뻔 했다. 적막을 깨트리듯 기어코 손 끝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에 얼룩을 남긴다. 감히 다가갈 생각도 못하겠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입술을 한참 달싹인 끝에.)
미안…해요. 선배.
(병실 문이 확 열리면 아까 나간 가이드가 다시 들어온걸까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그 곳엔 환자복을 입은 네가 서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또 다시 황금빛 생기를 빚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양 얼마나 응시했을까. 적막을 깨는 너의 말 한마디에 눈을 깜박인다.)
설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오래토록 열지 않아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가 흘렀다. 지치고 힘들어보이는건 물론이고 풀이 죽은 듯한 네 모습을 보고있자면 속이 상했다. 너를 꼭 안고 어르고 싶어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두 다리를 침대 밖으로 걸치면 상체가 순간 휘청 기운다.)
아...
아직,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돼요.
(한달음에 달려가 당신의 몸을 제 몸으로 바친다. 골절이 있다고 그랬는데, 이렇게 당신을 안아도 되는걸까. 걱정에 당신의 팔을 붙들면 당신의 옷에 혈흔이 묻어 검붉은 얼룩이 짙게 남는다. 그 모습을 보자 불에 덴 듯 손을 떼어낸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제 애정이, 당신에겐 이와 같을 텐데.)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혼자 보내지 않았더라면, 감히.. 제가 선배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럴 일 당할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래서.
(고장난 라디오 마냥 후회를 줄줄 읊는다. 이루어질 수 없던 확률들. 그러나 당신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왔으니까.)
설아, 설아.
(다소 단호한 목소리가 너를 불러세운다. 우선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부터 제 소매로 꽉 누르며 마저 지혈해주고, 한 손은 네 볼을 감쌌다. 널 올려다보는 미간이 평소답지 않게 짙게 구겨져 있었다.)
지금 너, 날 사랑한 걸 후회한다고 말하려는건 아니지? 만약에 그렇다면...
(슬프게 쳐진 두 눈이 더욱 짙게 빛나기 시작한다. 가이딩을 받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너에게 제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너가 날 용서해주지 않고 증오했더라도 난 지금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거야. 너가 날 사랑해서. 날 살릴 수 있었던 거야. 난 너 덕분에 두번째 기회를 얻었으니까.
(어쩌면 그럼 이번이 세번째 기회가 된 걸까. 비식 웃으며 좁혀진 미간 사이를 살짝 풀었다.)
구하러 와줘서... 난 너무 기뻐. 너가 나한테 와줘서.
(속삭이듯 뱉은 말을 끝으로 너를 다시 품에 와락 당겨안았다. 오래 참았다, 이 정도면.)
(피처럼 흘러나오던 후회를 당신이 지혈하자, 쓴 신음과 함께 뚝 멈춘다. 버석하게 마른 뺨을 당신이 감싸도, 도통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그는 당신의 물음에 찔려 고통스러운 내색을 비치며 기어코 당신에게 닿는다. 저는 아주 오래 앓을 것 같았다. 당신의 뼈가 다 붙고, 상처가 전부 아물어도, 당신을 잃을까 두렵겠지.)
전, 무서웠어요. 제가 늦을까봐. 선배가 저를, 버리고 아주 떠나버릴까봐. 겨우 남은 기쁨이라곤 선배에게 갈 능력이 있다는 것뿐이었죠. (그 중 제일 최악인 것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제 탓인 것 같음에도, 당신을 놓을 수 없는, 제 끔찍한 애착이다. 품에서 머뭇거리던 그가 당신의 옷을 겨우 쥔다.)
능력 사용하지 말아요. 나는, 정말로 선배만 있으면 되는데, 왜 계속.
너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떠났을지도 몰라.
(그야 넌 내게 이 땅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 커다란 미련이었으니까. 원하는 모든 건 언젠가 제 손을 거쳐가기 마련이라며 무소유, 무욕으로만 살아온 나에게 너는 한 시라도 손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된다. 그런게 사랑이라면, 난 그 모든 번뇌를 집어삼킬 각오를 하고 너를 끔찍이도 애정하고 있나보다. 노란 빛이 감도는 눈을 두어번 깜박이며 널 바라본다. 절박한 두근거림에 덮여서인지 이제는 네 곁에 있다보면 능력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치만, 이 능력이 바로 나야. 이것 덕분에 너가 날 만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이 행운 때문에, 나는 너를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제게로 옭아매고 있는건데.)
(당신의 말에 실감이 된다.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구나. 자꾸 거세게 붙잡고 싶은 마음을 달래느라, 손이 떨렸다. 나는 정말, 당신이란 샛별을 이 구렁텅이에 묶어둔 쇠사슬이며, 연꽃을 수면에 붙들어놓는 수렁이 되었나. 당신이 절 매몰차게 벗지 않는 이상, 더욱 옭아맬 생각 밖에 없어서.)
단 한번도, 그걸 선배라고 여긴 적 없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선배의 행운을 사랑한 것 같잖아요.
(상처받은 마음에 반해 평온한 어조가 나온다. 다행이지, 애써 무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윤이 나는 반지를 꺼내 당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넣는다. 남은 반지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당신의 손에 쥐어줄 수 밖에 없었다. 차마 건넬 수 없던 주사위는 여전히 제 주머니에 남았다.)
선배의 행운으로는, 제 의지나 사랑을 만들 수 없어요. 그걸...알아주세요.
(가슴이 아프게 두근거린다. 애써 가리지만 어조에서 미약하게나마 드러나는 너의 상처가 느껴져서. 이번엔 행운이 너를 끌어오는 대신 저로부터 멀리 밀어내는 것 같았다. 혼란이 묻은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 능력을 빼면 내겐 뭐가 남지? 너는 그 모든게 걷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조차도 그게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데. 기뻤으나 두려웠다. 내게 너는 처음 만져보는 사랑이라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내밀어진 손에 잃어버렸던 반지가 제자리를 찾자 작게 안도의 탄식을 흘린다. 태양이 새겨진 반지를 손에 쥐고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널 올려다본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어려있었다.)
내가 너무 오만했네.
(손등 위로 입술을 꾸욱 누른다. 너무 오랫동안 능력으로 사람을 감아온 탓에 너의 사랑이 순수하다는 걸 아직 실감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그걸 느낄 때까지 네 곁에 머물러 있으면 되겠지. 내가 널 감은게 아니라 너가 날 감아버린 것이 맞다면. 어쨌건 연꽃은 수렁을 벗어나서 살 수 없으니까. 그 순간 병실 문이 활짝 열린다. 의료진을 포함하여 간부 몇명이 제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검사와 취조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학생,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어른들이 네게 자리를 떠나길 요구하면, 네 손을 잠시 놓아줄 수 밖에. 괜찮을거라는 눈빛을 네게 전하고 미소지어보였다.)
(그에겐, 명료한 대답이 있었다. 당신에게서 행운을 앗아가도 당신이 남을 것이다. 으레 사람들이 그날 조금 불운했다고 하여, 본인을 잃어버리지 않듯이. 다만 당신은 조금 더 헤매지 싶다. 그럴지언정 제가 당신을 떠나지 않을테니, 당신은 두려워 말았음 좋겠다. 그건 제 몫이니까. 반지가 돌아와 안도한 것은 그 주인 뿐만이 아니다. 반지 역시 제 자리를, 제 주인을 잃어 불안했겠지. 당신을 잃을 뻔한 저처럼. 당신의 말을 부정이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망설임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당신의 입술이 제 손등에 눌리면 그 촉감이 낯설고 또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힌다. 마치 테라스에서 고백을 했던, 그 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제야 당신에게 해야할 말이 또 있음을 깨닫는다. 입을 떼려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아, 못다한 말이 있는데. 절 찾는 가이드의 목소리도 이제야 귀에 꽂힌다. 한숨을 작게 쉰 그가 몸을 숙여 아주 작게 속삭이곤 곧장 병실을 나선다.)
사랑해요. 이 말을 먼저 해야했는데. 이따 봐요.